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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시대, 무기력함 또한 저항의 한 모습 아닐까

입력
2014.10.0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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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동창과 술 한번 마신 이유로 81년 남산서 사흘간 고문 당해

민주투사로 왜곡된 자신에게 7년간 괴로워하다 세상 떠났지만

죽기 전 보름 동안 詩 300편 써

삼엄한 감시 아래 몸조심 하고 뜻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는 것도

나름 나쁜 권력에 대한 투쟁일 터

故 박정만 시인
故 박정만 시인

지난 10월 2일은 박정만이 세상을 떠난 지 스물여섯 해가 되는 날이다. 스물다섯 해라고 생각해왔는데, 손을 꼽아보니 스물여섯 해다. 박정만은 나에게 거의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1970년대 초에 군대에서 전역한 직후 한 잡지사에서 잠시 편집사원으로 근무했다. 뒷날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게 될 이윤기를 거기서 만났다. 출근한 지 일주일쯤 되는 날에 박정만이 그 잡지사를 찾아왔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출근’했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바로 박정만의 자리였다. 그 잡지사의 사원으로 일하던 박정만이 집에도 직장에도 알리지 않고 어딘가로 잠적해 버려, 회사가 나를 뽑아 그 자리를 메웠는데, 그가 석 달 만에 다시 출근을 한 것이다. 내가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서려 하자, 당시 그 잡지사의 주간이었던 권 아무개 시인이 나더러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 박정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후에도 자주 박정만은 퇴근할 무렵이면 나타나 옛 동료들과 함께 술집을 찾아가곤 했다. 나도 한 번 그 자리에 어울렸다. 아현동 어느 골목이었다. 양념한 돼지고기를 구우며 동동주를 마시는 집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박정만이 시비조로 내게 말을 걸어오면 가운데 앉은 이윤기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말리곤 했지만, 나는 오히려 유쾌했다. 그의 말에 재기가 있고 시적 울림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박정만은 1988년 저 88올림픽이 끝나는 날 비참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떠나고 나서 10여년이 지난 어느 해 겨울 이윤기는 ‘전설과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써서 그 죽음에 얽힌 사연을 상당히 소상하게 전해 주었다. 그 소설을 다시 펴놓고 읽으니, 예삿일을 말하는 듯 무심하면서도 구절구절이 곡진하고, 떠 있는 듯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소설가의 문체가 그날 저 아현동의 술집에서 박정만을 힐난하면서도 다독거리던 그 어조를 다시 떠올리게 하다. 이윤기도 이제는 저 세상 사람이다.

박정만은 1981년 5월 어느 날 그가 편집부장으로 근무하던 출판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의 잠적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능했지만 무책임한 사람이기도 해서, 또 한 차례의 잠적을 성사시킨 여자의 정체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여자는 없었다. 그가 자신의 대학 동창이기도 한 어느 소설가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오직 그 이유 하나로 검은 차를 몰고 온 사나이들에게 끌려갔다는 것도, 이제는 문학인들의 집이 된 남산의 어느 시설에서 내리 사흘 동안 “청동상”처럼 퍼렇게 온몸에 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려진 일이었다. 이후 박정만은 이 사흘간의 고문에서 비롯한 정신적 번민과 육체적 고통으로, 그에 따른 연이은 폭음으로, 7년여를 신음하던 끝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두고는 보름 동안에 300편 가까운 시를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였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민주투사 박정만’이라는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었다. 내내 무책임하게 살았던 만큼 순결했던 박정만은 이 왜곡된 전설을 괴로워했으며, 이 괴로움은 광주가 피바다가 되었을 때 자신이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을 더욱 생생한 것으로 만들었다. 시인은 어느날 저녁 친구 이윤기를 불러 “두 개의 5월”로 갈기갈기 찢겨 있는 자기 심경을 유언의 형식으로 말했다. 이윤기는 이 유언을 소설로 전하면서, 그때까지도 널리 퍼져 있던 전설에서 죽은 친구를 해방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윤기가 그 소설로 전하려 했던 바는 박정만이 민주화운동을 한 적이 없으며,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은 데 지나지 않는”다는 그 말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박정만에게 ‘운동’이 무엇이었던가를 말하고 싶었으리라. 박정만은 적어도 “5월의 치욕”을 안고 죽었으며, 그 험한 시대에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운동의 진실’일 수도 있다.

박정만이 모처에서 처참하게 얻어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와 분노에 치를 떨지 않은 문인은 없었다. 그가 당한 고초는 다른 누구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분노와 공포의 치 떨림은 비록 무기력한 것이었지만, 무기력한 그대로 ‘운동’의 한 깊이였다. 어떤 사람은 삼엄하고 사악한 감시 아래 가능하면 몸조심을 하려 했다. 몸을 다치지 않고도 역사에 뜻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늙은 아버지는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아침마다 아들에게 당부했다. 그 치욕의 시대에 사람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날마다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으며, 바로 그렇게 나쁜 권력을 거부하였다. 박정만보다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들은 매우 고독하였지만, 그러나 저 ‘무기력한 힘들’이 항상 등 뒤에 있음을 모를 수 없었다. ‘운동’의 한 진실이 그와 같다. 힘찬 목소리로 떠받들린 전설 속에서 무기력한 진실을 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공식적인 역사 서술의 뒷자락에서 문학이 해야 할 일이 실상은 그것일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로서의 박정만은 81년의 고문에서부터 88년의 죽음까지 일곱 해에 걸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에게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시는 직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며, 첫 부인과도 이혼했다. 그는 몸도 마음도 끝내 꼿꼿하게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문학은? 그의 시세계도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세계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능숙하게 사용하던 ‘전라도 가락’이 줄어든 만큼 사실적인 표현들이 많아졌고, 간간히 산문시를 쓰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시라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시에서 그의 시가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유명을 달리하던 해인 1988년 초에 세 권의 시집을 연달아 펴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시집인 ‘슬픈 일만 나에게’에는 ‘수상한 세월’이란 제목으로 세 번에 걸쳐 쓴 연작시가 있다. 편마다 다섯 행으로 끝나는 이 짧은 시편에서 박정만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군화 신은 아이들이” 그 막막하고 깊고 어두운 고문실에서 자기 몸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상처를” 내놓고는 “나이팅게일 그려진 안티플라민을 주었다”고 썼다. 자신이 그 어두운 지하실에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물 먹고 반쯤은 죽어갈 때”, 한 여자가, 아마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을 그 여자가 저 “소름 끼치게 찬란한 국풍장(國風場)”에 갔었다고 썼다. “다리뼈에 비록 바람은 들었지만” 아직은 “숫돌에 칼을 갈 힘이 푸르게 남아” 있으니 “너희들의 살점을 죄 발라먹어야겠다”는 복수의 다짐도 잊지 않고 썼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곁으로 드러난 분노는 거기서 그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어떤 역사적 변혁이나 그것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투쟁 같은 것은 그의 시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그에 합당한 언어를 만들어낼 소질이 그에게는 없었다. 고문 이후 그는 죽음을,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화될 어떤 시간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죽음의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의 죽음 직후에 발간된 사후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에는 ‘우리들의 평화주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다섯 편의 연작산문시가 있다. 다음은 그 가운데 마지막 편이다.

어둠 속에서도 한 덩이의 숯과 소금이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불의 장미는 미인의 꿈속으로 파고들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한 그릇의 장국 속에서도 그의 견해를 올바르게 피력했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끝에는 으레 공작의 꼬리 같은 무지개가 피었으며 그 혈통을 잔인하도록 선명하게 주장했다. 난만하게 퍼지는 것은 빛깔이 아니라 공기 중의 풀잎의 순도 때문이다. 미인은 한 가닥의 순은처럼 꼭 그러한 길에만 나타난다. 청명 때였다. 먼 산이 갑자기 내 이마에 와 멎고, 홀연히 어디선가 청아한 꾀꼬리 울음소리가 한마장의 거리를 달려와 내 귀에 멈추었다. 아무래도 시국이 심상치 않았다.

막막한 어둠 속에도 세상을 밝힐 숯불이 있고 부패를 막을 소금이 있다. 장미처럼 피어나는 그 불꽃이 어떤 “미인”을, 다시 말해서 그 미인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길을 내니, “한 그릇의 장국”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떳떳하게 자신의 사람다움을 피력할 수 있다. 징벌의 홍수가 지나가고 나면 하늘에 언약의 “무지개”가 떠올라 평화가 삶의 본질임을 “잔인하도록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피어난 풀잎의 순결한 빛이 하늘에 비쳤기 때문이다. 미인은 그 순결한 빛 속에 나타난다. 그 세상이 벌써 가까이 왔으니, “아무래도 시국이 심상치” 않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을 순진하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오히려 어떤 폭압도, 어떤 잔혹한 고문도 그의 시를 깨뜨리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박정만은 그렇게 투쟁했다. 희망은 늘 그렇게 순진하게 밑바닥에 깔려 있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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