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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로 느릿느릿…천년의 시간을 곱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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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로 느릿느릿…천년의 시간을 곱씹다

입력
2014.10.0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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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꽃 활짝 핀 황룡사지를 달린다. 한 왕국의 흥망성쇠가 오롯이 깃든 절터의 가을이 고요하고 평온하다. 천년 전 흥성거림이 바람 타고 전해진다.
개망초꽃 활짝 핀 황룡사지를 달린다. 한 왕국의 흥망성쇠가 오롯이 깃든 절터의 가을이 고요하고 평온하다. 천년 전 흥성거림이 바람 타고 전해진다.

경주 갈 때 마다 마음 참 편안해진다. 오래 전 수학여행의 추억은 퍽퍽한 일상의 치료제와 같아, 게워내 곱씹으면 도시생활의 먹먹함 잊히고, 입가에 미소가 절로 묻어난다. 묵은 왕도(王都)가 주는 애틋함도 마음 차분하게 만든다. 여인의 가슴처럼 봉긋한 고분 사이를 지나고, 그 옛날 흥성거림 오롯한 절터를 가로질러 천년의 시간을 이어온 전설과 역사를 좇다보면, 시간은 이미 고대(古代)로 거슬러 오르고, 촌각 다투는 현실의 급박함도 덩달아 묽어진다. 이러니 경주는 ‘힐링’의 땅이고, 애써 찾아가볼만한 가치 있는 여행지다. 자전거로 돌아보면 이 느낌 훨씬 더 진하다. 그래서 올 가을 경주에 간다면, 꼭 자전거 타고 구경한다. 시간에 각인된 역사는 변치 않겠지만, 이를 마주하는 방법에 따라 얻게 되는 감정은 천차만별. 자동차로 ‘휙~’하고 지나며 보던 풍경이 문득 새롭고,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전설과 이야기는 더욱 실감난다.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의 너른 들판은 이 가을 연인들 차지다.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의 너른 들판은 이 가을 연인들 차지다.

● 왕궁 자리에 수채화 같은 연인들 사랑 흐르고

동선은 이렇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출발해 월지를 구경하고 월성을 지나 ‘경주 최부잣집’이 있는 교촌마을을 둘러본다. 계림을 지나 첨성대, 노서동 고분군, 그 유명한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을 구경한 후 황룡사지 지나 분황사까지 간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곧 누렇게 변할 은행나무 길을 따라서 가다가 황복사지 3층석탑을 구경하고 진평왕릉에 들러 숨 고른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판을 가로질러 낭산 중턱의 선덕여왕릉을 찾아보고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돌아온다. 경주역사지구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코스다. 느릿하게 돌아보기 위해 한나절쯤 시간 낸다. 자전거 이용하면 주말이나 공휴일처럼 인파 몰릴 때도 여행하기 편하다.

출발은 국립경주박물관이 무난하다. 박물관 주차장 인근에 자전거 대여소가 있고, 가져 간 차를 주차하기도 편하다. 자전거 빌리는데 두 시간 5,000원, 하루 종일 1만원이다. 출발 전에 박물관은 구경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게 되는 것이 여행이다. 각종 유물과 전시자료 들여다보면 경주가 훨씬 더 잘 보인다.

코스 가운데 첫 번째로 눈길 끄는 곳은 월성이다. 초승달 닮은 이 성안에 신라의 궁궐이 있었다. 성곽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자전거 몰아보고, 성곽 따라 뿌리내린 울창한 소나무 숲에 앉아 숨도 고른다. 이 가을, 성곽 앞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은 사랑 속삭이는 연인들 차지다. 여태 초록인 잔디와 은빛 억새 어우러진 풍경 속의 연인들. 동화 속 왕자와 공주가 따로 없다. 마음 예뻐지게 만드는 풍경. 천년 묵은 시간의 향기보다 더 진한 연인의 사랑이 여기 있다. 성곽에 서면 첨성대가 아득하고 목화밭도 광활하다. 얼음저장고인 석빙고도 남아있다. “얼음이 더워서 다 녹았나봐요!” 순진한 아이의 외침이 가을처럼 맑게 울린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탄생 설화가 깃든 계림.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탄생 설화가 깃든 계림.

월성에 닿기 전에 동궁 터와 월지를 지난다. 월지는 안압지로도 친숙한 그 연못. 여기 가면 연못 유심히 살핀다. 매끈한 원형이 아닌, 가장자리가 굴곡진 형태. 걷는 내내 야트막한 구릉이 튀어나와 연못 일부를 늘 가린다. 좁은 연못은 마치 거대한 호수나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의도적이다. 연못 넓어보이게 하려는 옛 사람들의 지혜가 놀랍다.

신라 왕궁의 별궁이 동궁이다. 신라의 왕자가 거처했고 나라에 중요한 손님이 오면 연회도 열렸다. 조선 경복궁의 경회루,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이라 생각하면 맞다. 야간에 조명 켜지면 더 예쁘니 저녁 무렵 산책 계획 있다면 잊지 말고 들른다.

월성 아래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계림이다. 흰 닭이 그의 탄생을 알렸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전설 한자락 걸친 숲에는 신령스러운 자태의 고목들이 가득하다. 숲 가장자리 우아한 능(陵)은 내물왕릉이다. 계림 앞이 그 유명한 첨성대, 그 옆이 노서동 고분군, 다시 도로 건너면 대릉원이다. 첨성대에서는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부드럽게 휘어지는 곡선을 음미한다. 고분 못지않은 아름다움에 눈이 번쩍 뜨인다. 노서동 고분군에는 신라 금관이 처음 발견된 금관총이 있다. 대릉원에는 천마총, 황남대총, 미추왕릉 등 신라 김씨 왕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23기의 웅장한 고분이 자리한다. 이들 구경하며 산책하고 돌담길 따라 주변을 자전거로 돌아본다.

첨성대. 푸른 하늘 아래 단아하게 서 있는 자태가 멋지다.
첨성대. 푸른 하늘 아래 단아하게 서 있는 자태가 멋지다.

교촌마을은 계림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다. 99칸에 달했다는 ‘경주 최부자집’은 구경한다. 이 고택의 곳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곳간이다. ‘최부자’는 흉년 때 이 곳간을 열어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 최부자의 행동 지침 가운데 하나였다. 뿐만 아니다. 구태를 없애고 곤경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데도 앞장선다.‘최부자’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최진립이다. 후손들은 원성의 대상인 마름을 없애고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너른 들판 한 가운데 위치한 진평왕릉.
너른 들판 한 가운데 위치한 진평왕릉.

● 가을날 더 고즈넉한 절터와 왕릉

코스 가운데 황룡사지, 진평왕릉, 선덕여왕릉은 한갓지니 여기 들르면 마음껏 게으름 부리며 쉬어간다. 월성 일대 이름난 곳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운치가 있다.

황룡사는 신라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총면적 6만6,115㎡(2만여평), 동서 길이가 288m, 남북 길이가 281m에 달했단다. 이곳에 있던 구층목탑이 있었는데 높이가 20층 건물과 맞먹는 80m나 됐고, 금당(불상을 모신 곳)에 모신 금동장륙상은 무게가 무려 21톤(약 3만5,000근)에 달했으며 이 절 짓는 데만 93년이 걸렸다니 그 규모에 입이 쩍 벌어진다. 기둥 하나, 석탑 한기 남아 있지 않은 절터에 한 왕국의 흥망성쇠가 오롯하게 스며있다. 그날의 흥성거림이 활짝 핀 개망초 꽃이 되어 들판에 차곡하게 내려앉는다.

구황동 너른 들판 한가운데 진평왕릉이 있다. 그 유명한 선덕여왕의 아버지다. 소나무가 경배하듯 능을 향해 몸 굽힌다. 능 주변은 황룡사지 못지않게 고요하다. 유럽의 아름다운 어느 공원을 떠오르게 만드는 서정적 풍경에 문학적 영감이 꿈틀댄다. 우람한 나무 아래 앉아 마음 살피고, 능 앞 잔디밭에 누워 급할 것 없는 오후를 즐겨본다. 긴장이 절로 풀리면서 가을이 참 상쾌하다는 생각 든다. 능은 고상하고 기품이 있다.

낭산 서쪽 중턱에 있는 능지탑.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졌다.
낭산 서쪽 중턱에 있는 능지탑.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졌다.

선덕여왕릉은 진평왕릉에서 자전거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낭산(해발 108m)에 있다. 낭산은 높지 않지만 예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다. 거문고인 명인 백결선생이 살았고 해운 최치원이 공부하던 곳도 여기다. 산의 서쪽 중턱 능지탑은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졌다. 사천왕사지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약 500m쯤 오르면 선덕여왕릉이다. 드라마가 방송되기 전까지 경주 사람들도 잘 몰랐단다. 드라마가 방송된 후 찾는 사람 늘었다지만 한갓지기는 여전하다. 제단에 놓인 꽃들이 아름답다.

진평왕릉에서 선덕여왕릉 가는 길. 가을걷이 앞두고 황금들판이 펼쳐진다.
진평왕릉에서 선덕여왕릉 가는 길. 가을걷이 앞두고 황금들판이 펼쳐진다.

진평왕릉에서 낭산까지 이어진 길이 참 멋지다. 가을걷이를 앞두고 들판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니 그야말로 ‘황금들판’. 길은 이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오후 볕을 받아 오글거리는 들판을 달리면 아득한 천년의 세월이 손에 잡힌다.

자전거 타고 보는 가을날 경주의 모습이 이토록 애틋하다. 여운 오래 남을 풍경과 이야기가 사방 천지다.

● 여행메모

경주역과 대릉원 주변, 국립경주박물관 주변 등에 자전거대여소가 많다. 역사유적지와 문화재를 관람하며 자전거로 돌아보기 적당한 코스는 국립경주박물관→동궁터ㆍ월지→월성→계림→교촌마을→계림(회귀)→첨성대→노서동 고분군→대릉원→황룡사지→분황사→황복사지 3층석탑→진평왕릉→낭산→선덕여왕릉→국립경주박물관. 쉬엄쉬엄 구경하며 돌아보면 4~5시간 걸린다. 경주시문화관광과 (054)779-6078

경주는 한우 떡갈비가 유명하다. 보문동 숲머리마을 일대에 떡갈비 음식점들이 많다. 또 이 마을 산해(054-743-7791)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돼지석쇠구이집이다.

보문호 일대에 호텔, 리조트가 많다. 한화리조트 경주에는 지하 750m에서 솟는 천연온천수를 이용한 물놀이 시설 ‘스프링돔’이 있다. 가족이나 연인이 함께 즐기기 제격이다. 1588-2299

경주=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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