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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법원이 보수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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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법원이 보수가 된 이유

입력
2014.10.0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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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5대 4로 보수파 우세… 기업·부자 정치자금 기부한도 없애고

동성결혼 합법 결정했지만… 심리 안하는 방식으로 묵시적 허용

연방대법 신뢰도 30% 수준… 3대 연방기관 신뢰성 도전받아

6일 오후 1시20분. 미국 버지니아주 패어팩스 카운티 법원. 미 연방 대법원이 사실상 ‘동성(同性) 결혼’ 합법 결정을 내린 지 3시간 만에 이 카운티 사상 최초로 합법적 동성커플이 되길 원하는 여성 두 명이 나타났다. 이미 23년째 부부로 살아왔다는 이본 랜디스, 멜로디 마요 커플은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 현실이 됐다”고 기뻐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이날 버지니아 주 등 5개 주가 동성결혼을 금지해 달라며 낸 상고를 각하했다. 대법원은 별도 사유 없이 인디애나, 오클라호마, 유타, 버지니아, 위스콘신 주가 ‘동성결혼 금지는 위헌이므로 이를 허용하라’는 각 주의 항소법원 판결에 불복해 낸 상고를 심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각하 결정으로 2심 법원 판결에도 불구, 잠정 유보됐던 남성 간 또는 여성 간 동성결혼이 5개 지역에서 즉각 허용됐다. 또 항소법원 판결에도 불구, 주 정부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은 콜로라도, 와이오밍, 캔자스, 웨스트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역시 게이ㆍ레즈비언 커플이 이성 부부와 똑 같은 법적 지위와 사회보장 혜택을 누리게 됐다.

미국 여론과 전문가들은 이날 결정으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적 지위를 얻은 것으로 받아 들이는 분위기다. 기존 19개 주(워싱턴DC 포함)와 새로 합법화된 11개주를 빼면 나머지 20개주는 여전히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커플만 부부로 인정한다’는 주법을 갖고 있으나, 동성 커플에 의한 소송 등이 진행되면 같은 하급법원 판결과 연방 대법원 결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청교도 이민자들이 세운 미국을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나라’로 결정한 연방 대법원에 대해 보수ㆍ진보 진영 모두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버지니아 주하원의 밥 마샬(공화당) 의원 같은 보수파가 ‘동성결혼 허용으로 일부다처제와 변태적 성행위도 합법화되는 길이 열렸다’고 분노하는 건 일견 당연하다.

그런데 반대 쪽에서는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등 진보성향의 여론과 인권단체마저 연방 대법원을 비난하는데, 공격 포인트는 ‘여전히 보수적 행태를 버리지 못했다’는 데 모아진다.

뉴욕타임스는 연방 대법원 결정을 다룬 ‘동성결혼에 대한 묵시적 인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국민 여론은 (이미 동성결혼 합법으로) 정해졌는데도, 대세를 거스른 채 입장 표명을 거부했다’고 평가했다. 대법원이 결과적으로 동성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는 집단의 손을 들어주기는 했으나, 동성결혼 자체에 대한 합헌성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한 심리를 무책임하게 피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여론조사에 따르면 1996년 27%에 불과했던 미국 사회의 동성결혼 지지율은 2011년을 전후로 50%를 넘은 뒤 최근에는 54%까지 상승한 상태다. 상황이 이런데도 9명 대법관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보수 성향 대법관(5명)들의 담합적 행태로 시대변화와 민심 흐름에 역행하는 판결이 계속되고 있다는 게 진보진영의 논리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보수 행태에 대한 이 같은 논란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계속되고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민주당이 우세한데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 공화당 정권에서 임명한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대법원을 장기간 장악하는 바람에 ▦선거관리 ▦의료보험 개혁 ▦유색인종ㆍ여성 소수계층 인권보호 등에서 민주당 정책을 가로막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대표 사례가 지난달 말 내려진 오하이오주 사전선거 기간 축소 명령이다. 오하이오에서는 주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11월 중간선거에서 유리하도록 사전선거 개시일(당초 공식투표일 35일전)을 일주일 늦춘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연방 순회법원(2심)은 지난달 24일 위헌소지가 있다며 원래 규정대로 치르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오하이오주 공화당의 긴급 심리 요청을 받은 연방 대법원은 2심 결정을 뒤집고 사전선거 기간을 28일로 축소토록 명령했다.

기업, 이익단체, 부자들의 정치자금 기부한도를 없앤 것도 공화당을 위한 정치 편향적 판결로 분류된다. 연방 대법원은 올해 초 ‘정부가 개인의 정치 후원금 총액을 제한하는 것은 수정헌법 제1조가 규정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도 대법관 9명 가운데 보수 성향 대법관 5명은 ‘위헌’, 진보 성향 4명은 ‘합헌’으로 엇갈렸다.

올해 5월에는 기업주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직원의 피임을 건강보험 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는 피임, 불임수술 등 임신조절에 드는 비용까지 보험적용 대상에 포함한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안에 치명타를 날렸다.

‘자유와 인권의 파수꾼’으로 불려온 연방 대법원이 보수적 행보를 거듭하면서 미국인의 신뢰도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갤럽에 따르면 최근 18세 이상 미국 성인 남녀 1,027명을 대상으로 16개 정부기관의 신뢰도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연방 대법원을 매우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전체의 30%에 머물렀다. 갤럽은 1973년 이 조사가 시작된 이래 최저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연방 대법원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는 레이건 정부시절이던 1985년과 1988년에는 56% 수준을 기록했다. 이후 추세적으로 낮아지기는 했으나 2006년까지는 40%대를 유지했으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집권을 계기로 현재처럼 보수적 기질이 공고화하면서 신뢰도가 30%대로 추락했다.

갤럽은 미국 사회에서도 보수ㆍ진보의 갈등이 본격화하면서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는 사법부의 권위마저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계속된 정쟁으로 의회 신뢰도가 사상 최저인 7%, 오바마 대통령의 국정 신뢰도 역시 30%대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사법부마저 정파적 이해관계에 충실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삼권 분립 연방기관 전체의 신뢰성이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 조철환 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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