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휴전협정 뒤 북한과의 후속 정치회담을 책임진 아서 H 딘 유엔군 정전위원회 수석대표는 휴전협정 주역인 윌리엄 해리슨 유엔군 수석대표(육군 중장)에게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어떻게 협상해야 하느냐”고 조언을 구했다. 이에 해리슨 수석대표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얼마나 질렸는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Don’t(하지 마세요).”
▦ 난해한 북한의 협상 행태, 행동양식에 대한 연구는 우리보다 미국 쪽에서 관심이 많고, 주목할 만한 책도 많이 나왔다. 휴전협정뿐만 아니라 1960년대 미국 전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70년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에 이어 90년대부터 계속되고 있는 북핵 문제에 이르기까지 적성 국가인 북한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조성해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만드는 위기 외교에서부터 지연전술, 위협하기, 교묘한 발뺌 등 북한의 협상 전술은 현란하다. 그 백미는 전쟁 위험이 고조된 93년 북핵 위기 당시 보인 벼랑 끝 전술이다.
▦ 북한이 대책 없는 강공책만 구사하는 걸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휴전 회담 유엔군 측 초대 수석대표인 터너 조이 제독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라는 책에서 북한의 협상 행태를 12가지로 정리했다. 대부분 강탈적인 흥정을 하는 가운데서도 북한이 드물게 양보하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회담 도중 돌연 터무니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관한 그들의 양보를 대가로 본래 협상 쟁점에 대한 상대편의 양보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곁가지의 양보를 통해 핵심적인 양보를 얻어내는 식이다.
▦ 그제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을 계기로 한 북한 수뇌부의 깜짝 방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최근의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태도와 맞지 않는 최상급 유화 제스처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핵심이다. 손을 내미는 상대의 선의에 답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양보 전술 범주다. 우리측의 고위급 회담 제안을 거부하던 북측 고위 인사들이 이번에는 우리 쪽이 편한 날짜를 잡으라고도 했다. 설사 창조적 위장술이라 해도 우리가 거부할 이유는 없다. 어려운 발걸음을 한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선물도 준비해야 한다. 북한은 예측을 불허하고 능수능란하다는 게 또 입증됐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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