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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역사서 서술

입력
2014.10.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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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합쳐서 보통 ‘사한(史漢)’이라고 부른다. 두 책은 중국 고대사의 정사(正史)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역사서로서 같은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적지 않다. 특히 역사인식에 있어서 두 책은 상당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사기가 역사서 서술의 기본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사기는 ‘12본기(本紀), 10표(表), 8서(書), 30세가(世家), 70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이 편찬한 사기 주석서인 사기 정의(正義)에 따르면 황제들의 사적인 본기를 12편으로 나눈 것은 1년이 12개월인 것을 본 뜬 것이고, 10편의 표는 강유일(剛柔日)을 본뜬 것이다. 천간(天干) 10일 중 양(陽)에 해당하는 강일(剛日)이 5일이고, 음(陰)에 해당하는 유일(柔日)이 5일로서 모두 10일이다. 서(書)를 8편으로 한 것은 일 년이 여덟 절기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본뜬 것이고, 세가 30편은 한 달이 30일인 것과 수레의 바퀴살이 30개인 것을 본뜬 것이다. 세가는 이렇게 대대로 녹을 먹는 집안과 임금의 팔다리 같은 신하들의 충효의 득실(得失)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열전 70편은 일행(一行) 72일을 본뜬 것인데, 70이란 모든 수를 들어서 말한 것이고, 나머지 2일은 윤달의 나머지를 본뜬 것이라는 것이다. 장수절은 “모두 합해서 130편인 것은 1년이 12개월로써 윤달의 나머지가 있는 것을 본뜬 것이다. 태사공이 이 오품(五品)을 만들었는데 하나라도 없애는 것은 불가하다. 천지를 통리(統理:다스려 거느리다)하고 경계하도록 권장함으로써 후세의 본보기가 되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5품이란 ‘본기·표·서·세가·열전’의 다섯 분류가 인륜의 ‘부(父)ㆍ모(母)ㆍ형(兄)ㆍ제(弟)ㆍ자(子)’의 다섯 분류를 본떴다는 뜻이다.

사기 이후 반고의 한서를 비롯해서 동양의 많은 역사서들이 사기 체제를 본떠서 서술한 것은 단순히 서술의 편리함 뿐만아니라 하늘과 우주 자연의 이치를 인간 세상에 적용시킨 이런 철학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이 흉노와 싸우러 나갔다가 항복한 이릉(李陵)을 옹호하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을 당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서 사마천 열전에 따르면 사마천은 ‘(이릉은) 화살은 떨어지고 방도는 다했는데, 구원병은 이르지 않아서(矢盡道窮 救兵不至)’ 항복했을 뿐이지 한(漢)나라에 보답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변호했다가 궁형을 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사마천이 ‘항우(項羽)본기’를 ‘고조(高祖)본기’보다 앞서 서술했다는 점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漢)나라의 시조인 고조 유방(劉邦)의 본기보다 그와 맞서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던 항우 본기를 앞 순서에 배치했던 것이다. 지금 남ㆍ북한에서 이런 식의 역사서를 서술했다가는 당장 ‘반혁명’이니 ‘반국가’니 하는 사회적 비난과 함께 감옥에 갇힐 각오까지 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마천이 항우 본기를 유방 본기 보다 앞에 배치한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 유방의 부인 여후(呂后)를 ‘여태후(呂太后) 본기’에 서술했다. 여후는 아들 혜제(惠帝) 즉위 후 황태후(皇太后)로서 실권을 장악했고, 혜제 사후에는 다시 태자를 세우고 자신이 섭정을 하는 임조칭제(臨朝稱帝)의 선례를 처음 만들었지만 직접 즉위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항우나 여태후가 실질적으로 중원을 지배했던 사실을 높여서 ‘본기’에 수록했던 것이다.

반면 반고(班固)는 한서에서 항우를 ‘본기’는 커녕 ‘열전’ 첫머리에 수록하고 있다. 사기 열전의 첫 머리는 ‘백이(伯夷)열전’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린 것을 인정하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충절의 상징이다. 반면 한서 열전의 첫 머리는 ‘진승·항적(陳勝項籍) 열전’인데, 진승은 진(秦)나라 말기 혼란기에 농민 봉기를 이끌었던 농민봉기군의 우두머리이다. 항적(項籍)은 항우의 본명인데, 사기는 항우(項羽)라고 자(字)로 불러 높인 반면 한서는 항적이란 본명을 직접 거명해 반감을 드러냈다. 당나라 초기까지는 한서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위를 보이다가 당나라 중기 이후 사기가 역전되기 시작해서 지금껏 사기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가치를 뛰어넘는 이런 역사인식의 차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정부에서 유신시대처럼 국정(國定) 국사교과서 체제로 되돌아가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최근 대법원에서는 친북 역사교육을 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해군사관학교 전 국사 교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북한을 극도로 비난하면서도 북한 같은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채용하는 국정 체제로 되돌아가려는 그 속내가 궁금하다. SNS 단속 같은 정보단속도 마찬가지다. 사마천이 사기를 쓴 지 2,000년도 훨씬 더 지났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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