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건축사무소 공간 사옥이 얼마 전 복합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고 김수근 선생의 작품인 건축물을 최대한 원형대로 보존하는데 큰 의의를 두었다고 한다. 1971년부터 사무실로 사용되었다는 구관 내부는 전시장이 되었다. 비좁고 가파른 나선형 계단, 싱크대와 세면대 등이 그대로였고 구형 에어컨도 놓여있었다. 천장이 낮고 좁은 방마다 백남준, 바바라 크루거, 키스 해링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엉뚱하게 작가의 집이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내가 최초로 방문한 작가의 집은 셰익스피어의 생가였다. 그의 생가는 영국 워릭셔 카운티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있다. 대문호의 고향이 아니라면 보통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었을 곳이다. 20대의 나는 경외감이라기보다는 신기함에 가까운 감정으로 그곳을 ‘관람’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마을 도처에 늘어선 기념품 가게에서 셰익스피어의 초상이 인쇄된 머그컵과 책갈피를 구입했다. 물론 지금 그 물건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후에 여러 번 국내외 작가들의 생가나 생가 터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곳에서 열리는 문학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고, 관광지라고 해서 놀러갔다가 얼떨결에 방문한 작가의 집도 몇 군데 된다. 내가 가 본 작가의 생가나 기념관은 대부분 소박하고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지자체적 차원에서 해당 작가의 문학세계 보다 그 이름의 유명세와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에 더 큰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우려스러운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떻든 한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이름이 다른 무엇도 아닌 한 명의 작가라는 사실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 작가의 생가 복원과 문화재 화(化)를 바라보는 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 번째는 누구나 알다시피 그 일이 문학사의 보존에 아주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입장이다. 작가의 생가나 고향 마을을 방문해 둘러보는 일이 일종의 적극적인 문학적 행위라는 것이다. 독자는 한 작가의 내밀했던 공간을 돌아보면서 명작이 잉태된 비밀의 순간을 상상할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문학적 감동과 영감을 얻는다는 거다.
흥미로운 것은 또 다른 관점이다. 미국의 작가인 앤 트루벡은 저서 헤밍웨이의 집에는 고양이가 산다에서 작가의 집에 대한 보통의 관념을 신랄하게 뒤집는다. 그는 미국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 12명의 집을 방문하여 작가의 집이 실제 작가의 삶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관찰한다. 휘트먼의 집에는 다른 작가의 원고지를 가져다 책상에 흩뿌려놓았고 헤밍웨이의 집에는 수고비를 더 많이 받기 위해 미묘한 경쟁을 벌이는 안내원들이 있다. 어떤 관람객은 헤밍웨이의 타자기를 한번 쳐 보겠다는 일념으로 가이드에게 뇌물을 찔러주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보여주면서 ‘작가-작품-작가의 집’이 밀접한 관계라는, 오랫동안 보편타당하다고 여겨져 온 명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먼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작가의 집’을 복원하는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사유하는 데에 유념할 만한 시각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고향인 시코쿠 에히메 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우연히 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여기가 바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마을이라며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당신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 중 무엇을 가장 좋아하느냐 묻자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그분 책은 우리 같은 사람이 읽기엔 너무 어렵지요.” 오랫동안 잊히지 않던 건 환하게 웃던 그의 순박한 얼굴과 주름이었다.
전시장이 된 공간의 유리창 너머로 바깥 풍경이 손에 잡힐 듯 바라다보였다. 그것 또한 의도된 오브제처럼 느껴졌다. 조지 시걸의 작품은 오래된 싱크대 위에 놓여 있었다. 사무실이었을 텐데 여기서 누가 무슨 음식을 해 먹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간에서 내가 궁금해진 것은 현대 거장들의 미술세계가 아니라, 40년 동안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희로애락, 진짜 삶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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