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열의 시대다. 근대 민족국가 구심력이 예전만 못하다. 동북아 양강 안에서도 중심ㆍ주변 갈등이 내연(內燃) 중이다. 변방 비주류에게 자신감을 준 건 세계화다. 발칸화가 시작됐다.
“1987년 ‘영웅본색’은 쿵푸영화와 동의어였던 홍콩영화의 인상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홍콩 누아르에 대한 여러 분석이 뒤따랐다.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둔 홍콩 사람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는 해석에 공감이 갔다. 홍콩 누아르의 영상 속엔 내일은 없다는 듯 오늘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인물들이 어두운 색조로 그려지곤 했다. 속내를 알 수 없고 100년 동안 다른 삶을 살아온 중국 공산당에 자신들의 미래를 맡겨야 할 홍콩 사람들의 운명이 오버랩 될 만하다. 1997년 중국이 주권을 행사하면서 홍콩영화는 쇠락했다. 홍콩영화를 지탱하던 많은 자본이 빠져나갔고, 이민을 떠난 영화인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홍콩 누아르가 홍콩영화의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였는지 모른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영화 ‘무간도’시리즈는 중국 지배하 홍콩의 스산한 현실을 은유했다. (…) ‘나는 악당인가, 선인인가’ ‘나는 중국인인가, 홍콩인인가’. 경찰이면서도 삼합회 조직원인 두 주인공은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가 만들어낸 홍콩인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대변한다. 영국식 사회제도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홍콩인의 현실은 폭력조직원과 경찰을 겸하는 고통스러운 삶처럼 부조리하다. (…) 홍콩영화 역사도 중국과 홍콩의 껄끄러운 관계를 투영한다. 1960년대 중반 광동어 영화가 주류였던 홍콩영화계는 본토 출신 화교들이 진입하며 격변을 맞는다. (…) 홍콩의 중국 반환 뒤 본토의 후원을 바탕으로 만다린어 영화의 독주체제는 완전히 굳어졌다. (…) 오래 전 중국어권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본토와 대만과 홍콩에서 각각 온 친구들이 대화를 나누다 어색한 순간을 맞았다. 중국인 친구는 대만인과 홍콩인을 같은 나라 사람으로 대했다. 대만과 홍콩에서 온 친구들은 반발했다. 중국과 대만과 홍콩 사람들의, 각기 다른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느껴졌다. 중국인에게 홍콩은 광활한 중국 영토의 일부인 샹강(홍콩의 만다린어 발음)일 뿐이고, 홍콩인에게 중국인은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같은 민족이라 주장하는 무례한 지배자에 불과할 수 있다. (…) 언어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게다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 관계로 맺어진 두 집단끼리의 융합은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홍콩 민주화 시위는 언제 끝날지 모를 지난한 싸움의 서막이다.”
-우산혁명이 꿈꾸는 ‘화양연화’(한국일보 ‘36.5°’ㆍ라제기 국제부 기자) ☞ 전문 보기
“오키나와(沖繩)는 1972년 5월15일 이전까지 일본 땅이 아니었다. 당시 오키나와는 미국 땅이었다. (…) 일본과 미국이 이곳을 지배하기 이전, 오키나와는 ‘류큐(琉球) 왕국’(1429~1879년)이었다.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풍습을 갖고 있는 엄연한 독립국가였던 것이다. 최근 이 오키나와에서 ‘독립’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찬반 의사를 물은 스코틀랜드의 주민투표가 진행될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 중 상당수는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 오키나와 주민은 “진심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기원했다”고 했다. 그는 “본토에 비해 각종 차별을 받고 있는 오키나와의 상황이 스코틀랜드가 처한 현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본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경제,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각종 사건ㆍ사고에 시달려온 주민들 중 일부는 ‘그 옛날 류큐 왕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말을 수시로 내뱉곤 했다. 오래전부터 오키나와에서만 통용되는 ‘이자카야 독립론’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식 대중주점인 이자카야에서 한잔 마시면서 나누는 독립 논의를 지칭하는 말이다. (…) 당연히 제대로 된 논리나 근거가 있을 리 없다. 상대적인 불평등, 상대적인 박탈감 등에서 나온 감정적 반응이 주류를 이루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자카야 독립 토론장’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미군기지 문제이다. 상당수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땅에 일본 내 미군기지의 73.8%가 밀집해 있는 현실이 부당하다는 논리를 편다. (…) 물론, 아직은 오키나와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 다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일부 주민들은 만일 독립을 하게 된다면, 관광지 이외에 이렇다 할 자원이 없는 오키나와의 지역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반대하기도 한다. 요즘 오키나와 독립론은 단순한 ‘이자카야 논쟁’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오키나와 일대의 학자·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류큐민족독립종합연구학회’를 결성, 오키나와 독립의 의미와 가능성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이 학회의 한 관계자는 최근 언론을 통해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 이후 경제적으로 풍족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것은 꿈에 불과했으며, 미군기지만 몰려들었다”면서 “이제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오키나와 ‘독립론’(10월 2일자 경향신문 ‘특파원 칼럼’ㆍ윤희일 도쿄 특파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