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추’ 개봉 직전으로 기억한다. 주연배우 탕웨이와 인터뷰 자리였다. 기자회견처럼 한 명의 배우를 앞에 두고 열 명 안팎의 기자가 강의를 듣듯 듬성듬성 앉아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영화 속 자신의 대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뭐냐고. 탕웨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걸어 다가왔다. ‘뭐지? 뭐지?’ 심장이 뛰었다. 쿵쿵.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이스 투 미츄. 아임 애나.” 탕웨이의 손을 잡는 순간 뇌와 혀가 얼어붙었다. 엉뚱한 단어가 튀어 나왔다. “땡큐.”
창피하지만 정말 고마웠다. “만나서 반가워요. 난 애나예요.” 이 대사가 뭔지는 손을 뗀 뒤에야 깨달았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버스에서 작별을 나눈 뒤 다시 몰래 버스에 탄 훈(현빈)이 처음 만난 사이인 것처럼 장난처럼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자 애나가 받아 친 대사다. 사랑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랑’이라고 정식으로 이름을 붙여주는 장면이랄까.
가을이면 ‘만추’가 생각난다. 이 영화는 수작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의 대부분은 탕웨이가 만든 것이다. 김태용 감독은 “탕웨이는 미세한 얼굴 근육을 모두 쓰는 배우”라고 말했다. 정말이다. 애나는 남편을 살해한 죄로 복역하던 중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흘간의 특별 휴가를 나온 여자다. 7년이면 다 잊어버렸을 만도 하지만 그는 좀처럼 웃지 않는다. 표정 변화도 별로 없다. 탕웨이는 그런 애나의 복잡한 감정을 자신의 미세한 안면 근육으로 표현해낸다.
탕웨이는 훈에게 사랑을 느끼기 전까지 세 번 정도 옅고 어두운 미소를 짓는데 그 미소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예의상 잠깐 웃는 거예요.’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예요.’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거라서 어서 감춰야겠어요.’ 탕웨이는 이런 긴 설명을 미세한 표정 변화로 짧고 분명히 전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애나는 처음 밝은 미소를 짓는다. 출소 후 자유인이 된 애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카페에 혼자 앉아 있다. 카페 안엔 조용한 잡음만 버석거린다. 그러다 애나가 문득 혼잣말을 한다. “안녕. 오랜만이에요.” 뭔가 생각난 듯 살짝 미소 짓는다. 그리고 페이드아웃.
‘만추’는 자주 보는 영화가 아니다. 생활 언어가 아닌 암기 언어로 영어를 쓰는 듯한 현빈의 연기에 빠지기 힘들고 고저 없이 침잠해 있는 톤도 즐기기 어렵다. 하지만 저 탕웨이의 극세사 표정 연기와 그 연기의 결정판인 엔딩 장면만은 몇 번을 봐도 경이롭다.
최근 ‘만추’의 사운드트랙이 바이닐 레코드(LP)로 다시 나왔다. 지난해 소량 발매됐다가 금세 품절돼버린 음반이다. 영화 개봉 당시 나왔던 CD와 달리 탕웨이가 부른 중국 버전 엔딩 장면 삽입곡이 담겨 있다. 국내 개봉판에 쓰인 써니 킴의 ‘에브리웨어’도 매우 훌륭한 곡이지만 꽁꽁 언 호수 위 눈길을 걷는 것 같은 곡이라 영화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OST 음반에도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탕웨이의 노래가 담긴 이 음반이 몹시도 반갑다.
‘더 심 송 오브 레이트 오텀’(만추 주제가)이라는 다소 무성의한 제목의 이 곡은 작곡가 겸 색소폰 연주자 손성제의 ‘멀리서’를 탕웨이가 다시 부른 것이다. 곡의 정서나 탕웨이의 목소리, 중국어 발음이 영화의 엔딩 장면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마치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 같다. 홍콩의 유명 작사가 린시가 지은 가사는 이렇게 끝난다. “사랑은 한 사람이 우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 잘못이 있다면 당신과 내가 함께 메꾸어요 / 무언가를 기다리는 게 뭐 어때요 / 늦가을이 끝나지 않은들 어때요.”
가을이다. 법적으로 한국 며느리가 된 탕웨이가 새 영화 ‘황금시대’를 들고 시댁을 찾는다. 만날 기회가 생기면 인사 한번 건네야겠다. ‘나이스 투 미츄, 어게인.’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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