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대출 안된 책 추려보니
성석제 첫 소설집 '새가 되었네', 촘스키의 '불량국가'까지 의외
장서 22만권 중 2만권이 소박데기
60종 어렵게 골라 대출실에 전시, 50종은 목록에 독자 이름 올려
출간된 지 10년이 넘도록 도서관에서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 책은 어떤 책일까. 얼마나 못났으면 버림 받았을까. 아니, 좋은 책이 외면 당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도서관에서 잠자는 책 중에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있을지.
안양 시립 만안도서관이 독서의 달인 9월 한 달간 ‘아무도 빌리지 않은 책’ 특별전을 했다. 나온 지 10년 이상 됐으면서 한번도 대출이 안 된 책 가운데 양서 60종을 골라 대출실에 전시했다. 교양서와 인문서, 문학작품 위주로 선정했다. 너무 어려운 책은 빼고 유명 작가의 작품과 출간 당시 화제를 불렀던 책을 넣었더니 흥미로운 목록이 나왔다. 소박맞을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외면 당한 불쌍한 책들이 줄줄이 불려 나온 것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소설가 성석제의 첫 소설집 ‘새가 되었네‘(1996)가 대표적이다. 왜 아무도 빌리지 않았을까. 특별전을 기획한 만안도서관 사서 최미송씨는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만안도서관이 외진 곳의 작은 도서관이어서 이용이 그리 활발하지 않은 편임을 감안해도 어리둥절한 일이라고 했다. 이 책은 2003년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로 제목을 바꿔 개정판이 나왔다. 만안도서관에서는 개정판만 대출 실적이 있다. ’새가 되었네‘로는 아무도 찾지 않았다.
하성란의 ‘삿뽀로 여인숙’(2000), 윤대녕의 ‘정육점 여인에게서’(1996), 톰 클랜시의 ‘미러 이미지’(1996) 같은 소설과, 시집으로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1999), 김명수의 ‘하급반 교과서’(1994)도 대출이 전혀 없었다. 모두 인기 작가들이고 시 ‘하급반 교과서’는 2000년대 들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지만 불운한 책 행렬에 들어갔다.
출간 당시 화제를 일으켰지만 대출이 안 된 책을 보자. 식민지 시대 한국 문학의 근대성을 다룬 ‘오빠의 탄생’(이경훈 지음ㆍ2003),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사회학자로 활동하던 시절에 쓴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1998), 미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가 미국의 패권주의를 고발한 ‘불량국가’(2002), 한국 사회의 아웃사이더와 소수자들을 돌아본 ‘탈영자들의 기념비’(박노자 등 지음ㆍ2003) 등이 눈에 띈다.
이 책들이 대출이 안 된 것은 책의 수명이 갈수록 짧아지는 현상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도서관은 신간이 나오면 보통 2, 3개월 뒤 한꺼번에 구입한다. 때문에 화제작이라 해도 도서관에 등장했을 때는 세간의 관심이 줄어든 경우가 많다. 쉬지 않고 신간이 쏟아지니 몇 달 전에 나온 책은 며칠 전 나온 책에 밀려난다. 주목 받은 신간조차 단명하는 마당에 여러 해 전에 나온 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늙은’ 책은 서럽다.
특별전 목록에 들어간 어린이 책으로는 서정주 시인이 쓴 세계민화집 ‘모기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1996), 천상병 시인이 쓰고 중광스님이 그림을 그린 그림책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등이 있다. 좋다고 소문이 났지만 지금은 구하기 힘든 책들이다. 도서관도 갖고 있는 곳이 별로 없다. 만안도서관의 ‘모기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는 특별전에 나온 뒤에야 딱 한 번 대출이 됐다.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는 여전히 서가에서 잠 자고 있다.
60종을 특별전에 소개했더니 50종은 뒤늦게 대출이 됐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와 윤대녕의 ‘정육점 여인에게서’ 등 10종은 끝내 아무도 빌려가지 않았다. 나머지는 1~3회 대출이 이뤄졌다. ‘포은과 삼봉의 철학사상’(정성식 지음ㆍ2003)이 3회로 가장 많이 빌려갔다. 사서 최미송씨는 “삼봉 정도전을 다룬 TV 사극 ‘정도전’의 인기 덕분인 것 같다“고 짐작한다. 법곤충학 책인 ‘파리가 잡은 범인’(M. 리 고프 지음ㆍ2002)이 2회 대출된 데는 세월호 참사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검찰과 경찰이 총력을 다해 수배한 유병언씨가 변사체로 발견된 뒤 신원 확인 과정에서 법곤충학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전문가들만 알던 이 책이 인구에 회자됐다.
만안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는 책은 모두 22만권. 이 가운데 2만권이 한 번도 대출이 안 됐다. 사서 최미송씨는 “도서관 이용자들이 신간과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빌려간다”고 전하면서 “좋은 책이 묻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여름 일본의 한 대학도서관이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 책 100선’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트위터에서 보고 특별전을 기획했다. 찾는 이가 없던 외로운 책들이 덕분에 서가에서 불려 나왔다.
일본에는 이런 행사를 하는 도서관이 더러 있다. 예컨대 올해 1월 홋카이도 도마코마이 시립 중앙도서관은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는 이름으로 30년 동안 한 번도 대출이 안 된 책 150권을 소개했다. 미국 뉴욕의 대안공간 아트 인 제너럴이 지난해 개최한 전시 ‘빌려가지 않은 책들의 도서관’도 빛을 보지 못한 좋은 책들을 소개한 행사다. 한국에서는 만안도서관이 처음 해봤다. 다른 도서관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사를 하면 어떤 목록이 나올지 궁금해진다.
오미환 선임기자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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