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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국화를 통한 공부

입력
2014.10.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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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학교의 도처에 가을을 장식하는 노란 국화 화분이 놓여 있어 눈을 환하게 한다. 조선의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꽃 중 하나가 국화였다. 국화는 육체적으로도 사람에게 좋은 효능이 있다. 16세기의 학자 김인후(金麟厚)가 아내에게 준 시에서 “아내가 국화를 따 온 것은, 시골늙은이 오래 살라 한 뜻이라네(細君採菊來 以爲山翁壽)”라 한 데서 알 수 있듯 국화는 사람의 몸을 경쾌하게 하고 수명을 연장시키며 머리와 눈을 맑게 한다. 이 때문에 조선의 선비들은 가을이면 국화를 술에 띄워 마시고 차를 만들어 마셨다. 국화를 따서 붉은 베로 만든 자루에 넣어 베개를 만들면 머리와 눈을 시원하게 한다고 하여 가을이면 국화꽃을 말려 베갯속으로 삼기까지 하였다.

조선의 선비는 국화를 두고서도 생생한 삶의 공부를 하였다. 국화는 은자나 선비의 절조를 상징하는 꽃이다. 대개의 꽃이 봄에 피는 데 비하여 국화는 서리가 내린 이후에 꽃을 피운다 하여 그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뜻을 기렸다. 중국의 소동파(蘇東坡)가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를 이기는 가지가 있다네(菊殘猶有傲霜枝)”라 하여 오상고절이 국화의 별칭이 되었다. 18세기 문인 이정보(李鼎輔)가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라 노래한 바 있다. 이정보는 국화를 통하여 고상한 절조를 배우고자 하였다.

이에 비하여 18세기의 학자 신경준(申景濬)은 국화를 통하여 양보하는 정신을 배웠다.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온갖 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려 울긋불긋함을 다투므로, 봄바람을 일러 꽃의 질투라는 뜻의 화투(花妬)라 한다. 국화는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나 있다가 여러 꽃들이 마음을 다한 연후에 홀로 피어나 바람과 서리에 꺾이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양보하는 정신에 가깝다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국화는 강직하고 고결하여 여러 꽃들과 그 피고 지는 것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만한 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시각을 바꾸어 보면 사양하는 마음을 가진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힘과 지혜를 믿고 군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국화를 보고 이런 마음을 배웠으면 좋겠다.

99세까지 장수를 누린 조선 전기의 학자 홍유손(洪裕孫)은 국화가 늦게 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너무 이른 성취를 경계하는 정신을 공부하였다. 출세가 늦다고 불평을 한 후학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국화가 늦가을에 피어 된서리와 찬바람을 이기고 온갖 화훼 위에 홀로 우뚝한 것은 빠르지 않기 때문이라오. 세상 만물은 일찍 이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재앙인 법이지요. 빠르지 않고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그 기운을 굳게 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겠소? 서서히 천지의 기운을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하고 억지로 정기를 강하게 조장하지 않으면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취되기 때문이 아니겠소? 국화는 이른 봄에 싹이 돋고 초여름에 자라고 초가을에 무성하고 늦가을에 울창하므로 이렇게 되는 것이라오. 대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소. 옛사람들이 일찍 벼슬길에 올라 영달하는 것을 경계했던 까닭도 이 때문이라오.” 홍유손은 국화를 두고 조숙(早熟)보다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 중요하다는 공부를 하였다. 빠른 성취를 이루려다 낭패를 당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화를 보고 오히려 그 늦은 성장을 배울 일이다.

하나 더, 국화의 노란빛을 보고도 공부할 것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화는 여러 가지 빛깔이 있지만 그래도 노란빛을 정색(正色)으로 한다. 황색은 중정(中正)과 중화(中和)의 상징이다. 임금이 황색의 옷을 입는 뜻이 여기에 있다. 조선의 선비들도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신을 국화의 황색에서 배우고자 하였다. 이 땅의 고단한 백성을 다스리는 분들은 이 가을 국화를 보고 이리저리 배울 점이 많을 것 같다.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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