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청와대 비서관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속아 간부로 채용하거나 채용하려 한 사건이 뒤늦게 밝혀졌다. 집행유예 중인 사기전과 2범이 대기업 최고경영자를 속이는 데는 “나 이재만인데…”라는 전화 한 통으로 족했다.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세칭 ‘문고리 권력’으로 불려왔고, 특히 야당은 그와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 박 대통령의 보좌관 출신 정윤회씨를 비선조직 ‘만만회’로 지칭해 왔다.
검찰에 따르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된 조모(52)씨는 지난해 7월 대우건설 박영식 사장에게 전화해 “청와대 총무비서관 이재만이다. 사람을 보낼 테니 취업시켜 달라”고 말한 뒤 이튿날 사장실을 찾아가 대학 겸임교수 등 허위 이력서를 냈다. 바로 부장직급으로 특채된 조씨는 11개월간 근무하다 거짓이 들통나 올 7월 퇴사했다. 대우건설은 사기행각을 확인하고도 형사고발 등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조씨는 실제 이 비서관의 것과 유사한 번호로 휴대폰을 개통한 뒤 같은 수법으로 KT 황창규 회장에 접근해 “10여년 전부터 VIP(대통령)를 도왔고 현재도 한 달에 한두 번 만나 직언한다”고 말했다. KT는 바로 취업 절차를 진행했으나 청와대에 확인하는 과정에서 조씨의 범행이 밝혀졌다.
권력의 정점인 청와대를 사칭하는 고전적 사기 수법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줄을 이었다. 지난해 8월 청와대 교육비서관이라고 속여 대학총장 등을 상대로 18억원을 가로채려던 지방대 교수가 구속됐고, 올 4월에는 청와대 행정관을 사칭한 30대가 자녀 취업 등을 미끼로 2억3,000여만원을 받아 챙겼다 덜미를 잡혔다.
권력에 줄을 대 특혜를 보려는 비뚤어진 심리, 이를 악용한 사기행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권력형 뒷거래’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특히 이번 사건은 각종 인사에 개입한 의혹을 받아온 ‘만만회’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고 있다. KT는 “황 회장이 지시해 취업절차를 진행한 바 없고 오히려 조씨를 수상히 여겨 청와대에 신고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취업절차 진행과 청와대 확인이 병행됐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이 비서관의 추천이 있었다면 채용하려 했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부가 대선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공공기관 등에 낙하산 인사를 줄줄이 내려 보내는 것도 이 같은 범죄를 키우는 토양이다. 전문성이나 자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권력이면 다 통하는 세태를 약삭빠른 사기꾼들이 놓칠 리 없다. ‘청와대 전화 한 통’ 사기에 내로라하는 대기업까지 놀아난 현실이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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