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로폼 박스라는 게 있다. 보통 가정에서는 일 년에 몇 개 쓸까 말까 하겠지만 우리 섬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먼저, 요즘 한참 잡히는 갈치와 삼치를 얼음포장해서 보내거나 냉동 공장에 넣을 때 꼭 필요하다. 전복을 담는 작은 것부터 20㎏ 대형까지, 크기별로 열 가지 정도 된다.
이 박스가 없으면 바다 생물의 신선도를 유지한 채 육지로 보낼 수 없고 관광객이 사들고 갈 수도 없다. 일하러 갈 때 여러 명 도시락 담을 용도로 쓰이고 좁은 섬마을 집집마다 화분으로도 사용한다. 심지어 한쪽 면을 잘라내 낚시채비 감는 타래로도 쓴다. 바늘을 꽂아 놓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 박스가 동이 났다. 다들 이 물건을 찾아 가게로, 이웃집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찾아다녔다. 굳이 육지 생활로 비유하자면 밥은 있는데 밥그릇이 없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또는 새 컴퓨터를 샀는데 정전이 되어버린 것과 같다고 할까. 암튼 몹시 불편했다.
거문도에는 고흥 도양항에서 철부선이 하루에 한번 들어온다. 차량과 여객손님을 태우는데 사실 그동안 이 배가 스티로폼 박스를 싣고 왔다. 이곳에서 주문을 하면 도양 박스 가게에서 그 배 뒤쪽 빈 공간에 실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배에 화물허가가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스티로폼 박스가 화물이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해운조합에서 금지를 시킨 것이다. 물론 트럭에 싣고 오면 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스티로폼 박스라는 게 가볍지만 부피가 커서 몇 십 개만 실어도 일 톤 트럭 화물칸이 꽉 찬다. 그리고 차량 운임은 비싸다. 그 방법을 쓰면 삼천 원 내외 하는 박스 값이 몇 만원이 되어 버릴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버린다.
세월호 참사 이후 원칙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좀 우스운 게 세월호 사고 이후 해운조합이란 곳의 조직과 운영이 얼마나 엉망이며 엉터리인지 밝혀졌는데 그런 곳에서 법과 원칙을 내세우며 뒤늦게 통제를 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그리고 이렇게 막아버리면 이 박스를 사용할 방법이 없다. 여수에서 오는 여객선에는 화물을 실을 수는 있지만 여객우선이라 짐 싣는 곳이 넓지 않다. 박스를 대량으로 실을 수 없는 것이다.
법이 그러하니 지키는 게 맞기는 하다. 하지만 법을 따르자니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서 이곳 가게 주인들이 궁리 끝에 화물선을 빌려 박스를 싣고 왔다. 그동안은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각자 주문해왔던 것인데 이렇게 한꺼번에 싣고 오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대략 일 만개 정도 되었는데 종류별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워낙 여러 군데서 주문하다 보니 네 것 내 것 구분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자기 것을 찾아 헤매고 바뀐 것 되돌려주느라 다들 곤욕을 치렀다. 관광객들이 봤다면 그저 진풍경이었을 테지만.
우리는 법에 둘러 쌓여 살고 있다. 집을 고치거나 심지어 차를 몰고 나갈 때조차도 여러 가지 법률 조항을 만나게 된다. 얼마나 많은지 변호사마저도 헷갈릴 정도이다. 법이 많아서 편리하고 행복해 졌는가, 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철부선이 화물 허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법이 요구하는 화물칸 크기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재개발 구역이 있다. 그런데 가난한 한 노인이 집을 비워주지 않는다. 옮길 곳이 없고 돈도 없어서 그곳에서 계속 살겠단다. 이른바 알박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의 상황을 존중해서 일정기간 개발을 미룬다. 우리나라 이야기 당연히 아니다. 독일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거긴들 법이 없고 지자체나 개발업자들의 일정이 없겠는가. 무엇보다도 궁지에 몰린 사람을 법으로 윽박지르지 않는 것, 그게 법 이전 보편적 삶의 원칙이다. 세상에 법이 딱 하나만 있어야 된다면 ‘타인의 곤란을 헤아리는 마음을 갖는 것’ 아니겠는가. 재발방지를 위해 필요한 세월호특별법 같은 게 그렇다. 그러나 어떻게든 안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서는 ‘자신들의 곤란만 헤아리는 모습’이 보인다. 법률과잉의 불편과 꼭 필요한 법은 거부하는 모순 사이에 우리가 있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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