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의 시작은 서울 삼류극장에서였다. 대한극장과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 등 도심에 위치한 극장들이 개봉관이라는 호칭으로 위세를 떨치던 때였다. 한 편 값에 두 편을 볼 수 있는 재개봉관 화양극장에 1987년 홍콩영화 한편이 걸렸다. 개봉관에서 소리소문 없이 상영됐다 종영한 영화였다.
일종의 ‘패자 부활전’에 사람들이 몰렸다. 인기는 전국으로 번졌다. 신드롬이었다. 청춘들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위악한 표정을 지었다. 엇비슷한 홍콩 범죄영화가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비장미와 폭력 미학을 유치하다 싶게 강조한 영화들이었다. 홍콩 누아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1940~5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어두운 심리를 포착한 영화들을 지칭하는 필름 누아르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1987년 ‘영웅본색’은 쿵푸영화와 동의어였던 홍콩영화의 인상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홍콩 누아르에 대한 여러 분석이 뒤따랐다.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둔 홍콩 사람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는 해석에 공감이 갔다. 홍콩 누아르의 영상 속엔 내일은 없다는 듯 오늘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인물들이 어두운 색조로 그려지곤 했다. 속내를 알 수 없고 100년 동안 다른 삶을 살아온 중국 공산당에 자신들의 미래를 맡겨야 할 홍콩 사람들의 운명이 오버랩 될 만하다. 1997년 중국이 주권을 행사하면서 홍콩영화는 쇠락했다. 홍콩영화를 지탱하던 많은 자본이 빠져나갔고, 이민을 떠난 영화인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홍콩 누아르가 홍콩영화의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였는지 모른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영화 ‘무간도’시리즈는 중국 지배하 홍콩의 스산한 현실을 은유했다. 경찰 조직에 침투한 홍콩 범죄조직 삼합회의 조직원과 삼합회에 잠입한 한 경찰의 엇갈린 운명은 홍콩 사람들의 여러 상념을 가늠케 한다. ‘나는 악당인가, 선인인가’ ‘나는 중국인인가, 홍콩인인가’. 경찰이면서도 삼합회 조직원인 두 주인공은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가 만들어낸 홍콩인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대변한다. 영국식 사회제도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홍콩인의 현실은 폭력조직원과 경찰을 겸하는 고통스러운 삶처럼 부조리하다.
2004년 나온 영화 ‘2046’은 홍콩의 기약 할 수 없는 미래를 내다본다. 2046년이면 지금 홍콩이 누리는 형식의 자치는 종말을 고한다. 영화는 사랑을 찾아 시간 위를 떠도는 청춘들에 초점을 맞추며 홍콩의 우울한 앞날을 예감한다. 2046년이라는 제목만으로도 홍콩 관객은 울적해질 만한 영화다.
홍콩영화 역사도 중국과 홍콩의 껄끄러운 관계를 투영한다. 1960년대 중반 광동어 영화가 주류였던 홍콩영화계는 본토 출신 화교들이 진입하며 격변을 맞는다. 만다린어 영화와 광동어 영화가 오랫동안 홍콩영화계의 헤게모니를 다퉜다. 홍콩의 중국 반환 뒤 본토의 후원을 바탕으로 만다린어 영화의 독주체제는 완전히 굳어졌다. 홍콩의 대중문화가 중국 주류에 의해 점령 당한 현실이 홍콩인의 패배감을 부추겼으리라.
오래 전 중국어권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본토와 대만과 홍콩에서 각각 온 친구들이 대화를 나누다 어색한 순간을 맞았다. 중국인 친구는 대만인과 홍콩인을 같은 나라 사람으로 대했다. 대만과 홍콩에서 온 친구들은 반발했다. 중국과 대만과 홍콩 사람들의, 각기 다른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느껴졌다. 중국인에게 홍콩은 광활한 중국 영토의 일부인 샹강(홍콩의 만다린어 발음)일 뿐이고, 홍콩인에게 중국인은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같은 민족이라 주장하는 무례한 지배자에 불과할 수 있다.
홍콩 민주화 시위는 ‘영웅본색’이 등장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인지 모른다. ‘영웅본색’과 ‘무간도’와 ‘2046’ 등의 홍콩영화들은 중국 중앙 정부를 향한 홍콩인의 싸움이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언어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게다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 관계로 맺어진 두 집단끼리의 융합은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홍콩 민주화 시위는 언제 끝날지 모를 지난한 싸움의 서막이다.
라제기 국제부 기자 wenders@hk.co.kr
[뉴스A/S] 칼럼에 소개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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