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족의 눈물자리
조류 급해 예부터 접근 쉽지않아
연산군ㆍ안평대군 등 11명 유배지
올해 7월 교동대교 개통
해 뜬 후부터 자기 전까지만 통행
해병 검문소 출입증 교부받아야
이젠 강화터미널에서 버스도 다녀
“바람 조금 불고 안개 조금 끼면 배가 안 떴어. 15분이면 가는 거리인데 말이지. 배를 못 타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는 건 다반사였어. 뱃사람들에게 괄시도 많이 받았지. 정각에 출발한다 했는데 미리 떠나버려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항의 한번 못했어.”
인천 강화도의 서북쪽에 무심히 떠 있는 섬 교동도. 서울에서 지척이고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도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를 거쳐야 했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 오랫동안 외면 받았던 섬이다.
날씨뿐만 아니라 조수간만이 커 간조 때는 3,4시간씩 배 운항이 정지됐고, 물이 덜 빠질 땐 직선으로 15분(강화도 창후리선착장-교동도 월선포선착장)이면 닿을 거리를 1시간 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 은둔의 섬 교동도에 지난 7월 1일 다리가 개통됐다. 바다와 뻘 위에 짓는 난공사로 다리를 짓는 데 5년이 훌쩍 넘었다. 이젠 교동에도 강화터미널까지 잇는 시내버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이 지척이라 다리 통행 땐 검문을 거쳐야 한다. 외지인이 교동도에 들어가기 위해선 해병검문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출입증을 교부 받아야 한다. 다리 통행도 해가 뜬 후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로 제한된다.
그래도 주민들에게는 작지 않은 선물이 됐다. 추석과 설날 등 명절이나 주말이면 아들딸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손녀가 꼭두새벽부터 선착장에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가 들어오곤 하던 불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외지인의 발길도 잦아졌다.
하지만 다리 연결로 차량 출입이 빈번해지자 그 동안 자동차에 익숙치 않던 섬의 노인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특히 다리 진입로 구간에선 보도와 차도간 구분이 없어 보행길의 주민들이 쌩쌩 내달리는 차량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자주 노출돼 원성이 높다.
다리가 연결되기 전 외부와 차단됐던 교동은 그래서 격리된 시간의 간극이 품어준 소중한 보물들이 많다. 교동에서 가장 번화한 곳은 대룡시장이다. 하지만 그 시장 골목에선 타임머신을 타고 30~4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풍경을 만난다. 손으로 쓴 듯한 간판과 낡은 유리문, 옛 포스터 등은 외지인들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골목은 그리 길지 않아 잠깐이면 돌아볼 수 있지만 고스란히 쌓여있는 세월의 더께가 주는 매력에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1984년 남편 고향인 교동에 들어와 30년간 양복점 겸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이순덕(70)씨는 “예전에 양복점만 5곳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외지로 나가고 나이 드신 분들도 하나 둘 떠나면서 이제는 우리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빈 점포가 많지만 우리가 은퇴하면 더 썰렁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교동도 인구는 광복 당시 8,644명이었던 것이 6·25전쟁 뒤 많은 피란민으로 1965년에는 1만2,00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점차 감소하기 시작해 현재는 3,000명 수준이다.
대룡시장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면 읍내리가 나온다. 읍내리에는 교동향교와 교동읍성, 연산군 적거지가 있다. 남달우 인하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읍내리에 교동역사가 모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교동향교는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에 안향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선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유림들이 모여 분향을 한다.
교동읍성은 서해안 방어를 위해 쌓았다. 조선 후기에는 읍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의 본진이 주둔하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원래 세 곳에 누각을 갖춘 성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동문과 북문은 남아있지 않다.
전남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신하들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운 곳에 격리시켰다. 늘 그들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한양과 가까우면서 조류가 급해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됐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 만에 사망했다. 읍내리에 연산군 적거지가 조성돼 있지만 학계에선 읍내리가 아닌 고구리에 있었다는 이견도 있다.
읍내리의 부근당에는 일반 당집에 어울리지 않는 관복 등을 갖춰 입은 부부그림이 걸려있다.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로 추정된다. 마을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매년 굿을 한다고 한다.
부근당 인근에는 ‘강화도령’ 철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철종 잠저소가 있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3세때 먼 친척이 모함으로 피살되자 두려움으로 이곳으로 피신해 석달을 지냈다고 한다. 집터와 우물이 남아있다.
교동도는 아주 옛날 상고시대에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중심으로 한 3개의 떨어진 섬이었다고 한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입구에 있는 섬에 오랜 세월 강에서 흘러든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섬들이 하나로 이어졌다는 것. 그래서 섬의 중심은 거대한 간척지를 보는 듯 너른 평야다. 강물이 실어나른 진액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지금이야 휴전선 때문에 고립돼 있지만 섬은 예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바다와 강을 잇는 풍성한 물자가 모여들던 곳이었다. 자연히 돈이 많이 모였고 벼슬아치와 부자들이 다수 교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강화도를 어우르는 유명한 트레킹 코스인 강화나들길 19개 코스 중 9코스 다을새길, 10코스 머르메 가는 길이 교동에 있다. 269m 높이의 화개산 등산도 권할 만하다. 낮은 정상이지만 해발 1,000m급 산봉우리 이상의 전망을 지닌다. 너른 교동의 가을 들녘을 감상하다 고개를 조금만 더 들면 북녘이다. 개성의 송악산이 뚜렷이 윤곽을 드러내고, 황해도 연백평야는 강화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다.
교동도=글·사진 이환직기자 slamh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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