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열ㆍ가공하지 않은 생요리 먹기, 효능 알려지며 미국선 대중화
나물 반찬ㆍ저장 음식 발달한 한국, 로푸드 밥상과도 친화적 특성
매끼 100% 실천이 어렵다면 현미밥에 곁들여 먹는 것도 방법
사방에 날로 먹는 것 천지다. 누드 사진 검색하며 회의시간 때우는 국회의원들,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입만 벙긋대는 가수들, 회사를 제 집처럼 여기며 여직원들을 ‘딸’처럼 대하는 상사들. 자, 소모적인 분노는 집어 치우고 우리도 날로 먹어 보자. 날로 먹는 음식, 생채식에 대하여.
로푸드(raw food) 즉 생채식은 식재료를 가열하거나 가공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먹는 생요리를 이른다. 1893년 미국의 실베스터 그레이엄 목사가 치료를 목적으로 처음 로푸드 식이를 도입한 이래 보스턴의 자연건강센터 설립자인 앤 위그모어 박사, 생즙 요법으로 유명해진 노먼 워커 박사 등에 의해 점차 그 효능이 알려졌다. 생채식이 치료가 아닌 대중이 즐기는 요리로 개념이 바뀐 것은 2000년대 들어 유명 연예인들이 로푸드를 즐긴다고 밝히면서다. 데미 무어, 메건 폭스, 미란다 커, 귀네스 펠트로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건강과 미용을 위해 로푸드를 먹는다고 했다. 현재 미국 대도시에서는 로푸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레스토랑이나 주스바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미국식’ 로푸드 개념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2009년 서울 청담동에서 레스토랑 ‘소트루’가 문을 열었을 때 주인 최지영 씨에게 붙은 수식어는 ‘한국 유일의 생채식 연구가’였다. 소트루는 고기를 빼고 마와 찹쌀을 갈아 치즈를 대체한 피자 등 채식주의자를 위한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다. 생채식을 전문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최 씨는 “한국인의 식생활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따끈한 밥이 호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한국 문화에서 가열하지 않은 로푸드는 그야말로 찬 밥 취급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생채식은 대중화되지 않았고 소트루도 결국 문을 닫았다. 제육볶음과 치킨이 지배하는 한국의 밥상에서 정녕 생채식이 설 자리는 없는 것일까.
최근 출간된 책 ‘로푸드 디톡스’(리스컴)는 가정에서 생채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 이지연 씨는 경희대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식품독성학을 전공한 뒤 2012년 외식산업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로푸드를 접했다. 무너진 식습관을 바로 잡기 위해 로푸드를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이 씨는 아침 식사를 로푸드 음료로 대체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심과 저녁까지 매끼를 로푸드로 먹는 식습관을 실천하고 있다.
“아침 운동을 끝낸 뉴요커가 커피 대신 주스나 스무디를 마시려고 주스바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 매우 흔한 풍경이에요. 화식(火食ㆍcooked food)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맛 때문에 로푸드 레스토랑은 채식주의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있고 스타벅스에서 로푸드식 에너지바가 판매될 정도입니다.”
이 씨가 책에서 소개하는 로푸드의 특징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한국식 로푸드 식단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김밥을 비롯해 쫄면, 냉면, 덮밥, 잡채, 쌈밥 등 익숙한 음식이 가득하다. 물론 모두 가열하지 않고 날 것으로 만들었다. 샐러드라면 몰라도 밥이나 면은 어떻게 로푸드가 가능할까. 비결은 훌륭한 대체재 찾기, 그리고 갈고 다지고 써는 것이다.
그가 ‘로푸드 밥’을 만드는 데 추천하는 재료는 콜리플라워와 양배추, 콜라비. 이 재료들을 푸드 프로세서를 이용해 쌀알 크기만 하게 다진 뒤 기름과 소금, 레몬즙을 조금 넣어 비비면 비린내 없이 쌀밥의 질감을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옛날식 간장밥’의 경우 콜리플라워를 꽃 부분만 떼어 다진 뒤 참기름과 천일염, 후추로 버무려 완성한다. 밥처럼 고슬고슬한 느낌이 나도록 채소를 너무 잘게 다지지 않는 것이 핵심. 밥 위에 채친 김과 아보카도를 올린 뒤 양념장을 곁들여 먹으면 된다. 이 밖에 냉면은 톳으로, 잡채는 천사채로, 스파게티 면은 가늘게 깎은 애호박으로 대체할 수 있다.
“한국은 예부터 다양한 채소를 활용한 나물이나 저장, 발효음식이 발달했기 때문에 로푸드와 거리가 멀지 않아요. 매 식단에서 신선한 생채나물 몇 가지만 곁들여도 일상 생활에서 손쉽게 로푸드 밥상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 씨는 단기간의 다이어트를 위해 로푸드를 이용하는 것은 경계했다. 음식이 낯설어 오래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채소에 듬뿍 들어 있는 식이섬유 때문에 꼭꼭 씹어 먹는 것이 습관이 돼 있지 않으면 탈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100% 로푸드를 실천하는 사람도 많지만 실제로는 하루 음식의 50~70%를 로푸드로 먹는 사람이 가장 많아요. 아침에 흡수가 빠른 그린 주스나 스무디를 먹는 것으로 시작해 점심과 저녁은 현미밥에 로푸드를 곁들이는 것만 해도 훌륭한 로푸드 밥상이라 할 수 있죠.”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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