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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사이버 세상, 다시 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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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사이버 세상, 다시 사물이다

입력
2014.10.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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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인간 옆을 묵묵히 지켜오던 리모컨ㆍ냉장고ㆍ침대ㆍ술병...

시인과 작가에 말을 걸어오는지 각종 물건에 천착한 시ㆍ소설 봇물

“비누의 참다운 매혹은 그 덧없는 사라짐에서 나타난다. 비누가 영구불변하는 사물이었다면, 그 사라지지 않는 비누란 얼마나 끔찍한가!”_장석주 ‘철학자의 사물들’(동녘)

시인이 탄식처럼 터뜨린 저 말의 발원지는 아마도 화장실 세면대 위였을 것이다. 그의 시적 자기장이 너무도 강력해 형이하학의 물건에까지 닿은 것일까, 아니면 비누가 발산하는 형형한 기운이 시인의 뇌를 일순 건드린 것일까.

최근 서점가엔 사물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유난히 많다. 가구디자이너 이유미의 ‘사물의 시선’(북노마드)’, 미술 큐레이터 현시원의 ‘사물유람’(현실문화), 시인 52명이 한가지씩 사물을 택해 쓴 ‘시인의 사물들’(한겨레출판), 정신분석학자 살만 악타르의 ‘사물과 마음’(홍시), 디자이너 김상규의 ‘사물의 이력’(지식너머), 소설가 김중혁의 ‘메이드인 공장’(한겨레출판)까지.

책들이 주목하는 것은 책상 위를 잠식하고, 거리를 수놓고, 가방과 주머니를 채운 각종 물건들이다. 결과물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무뚝뚝한 필름 카메라, 다리가 짧아 슬픈 리모컨, 문을 열 때마다 환한 조명으로 반겨주는 냉장고, 안락을 선사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무의식을 빼먹으려고 혈안이 된 침대. 오랜 시간 인간과 부대끼며 기쁨과 슬픔, 공포와 고독에 전염된 사물들은 어느새 영혼을 획득해 제 주인에게 말을 건다. 사물의 수다에 특히 민감한 이들은 주로 시인이다. 유강희 시인은 ‘시인의 사물들’에서 혀가 없어 술 맛을 보지 못하는 술병의 오열에 귀를 기울인다.

“술병은 온몸으로 술을 간절할 뿐, 한 치도 제 공허를 적시지 못한다. 이런 참혹 속에서 술병은 저 혼자 타오른다… 그 결핍과 격절을 받아 적기 위해 오늘도 약질의 서정 시인들은 술병을 꼬나 잡고 키스를 퍼붓는다. 아니, 정확히는 술에 입술을 창(唱)한다.”

김상규 디자이너는 철제 대문에 흔히 붙어 있던 사자머리 문 손잡이에서 ‘탕탕’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대문 손잡이의 디자인에서는 청각적 요소가 시각 못지 않게 중요하다. 손잡이로 대문을 탕탕 두드려 그 집을 방문했음을 알리는 과정은 참 운치 있다. 이에 반해 오늘날 문들은 문패 없이 번호만 부착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효율을 생각하면 그러한 문을 설치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왕에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면 손님이 찾아왔을 때 울림통 역할을 해주는 게 어떨는지.”

‘메이드 인 공장’에서는 사물이 탄생하는 곳, 공장을 찾아간다. 사물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키기 위해 그 모태를 추적하려는 의도였을까. 지구본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작가는 수많은 지구가 널브러진 광경을 마주한다. “어딜 둘러봐도 전부 지구다. 반 토막 난 지구, 손질이 덜 끝나서 너저분한 지구, 깔끔하게 완성된 지구, 상자 속에서 출고되길 기다리는 지구. 이건 마치 우주의 모습 같기도 하다… 우주를 만든 하느님이 있다면 그 작업실의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늘 제자리에 있는 사물을 ‘재발견’하는 일은, 새로운 흐름이라 하기엔 매우 오래된 유희다. 하물며 가상의 세계가 물질의 세계를 집어 삼키는 작금의 상황에서 새삼 사물에 대한 관심이 치솟는 이유는 뭘까. 김상규 디자이너는 ‘보고 만지고 품고 맡는’ 물리적 세계가 쉽게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 예언한다. 무게감과 부피감, 질감을 디지털 상에서 구현하려는 대기업들의 눈물 나는 노력이 한 증거다. “그 동안 디지털의 문법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디지털이 아날로그의 문법을 따르려고 하는 것 아닐까…지금 사용하는 사물은 물론이고 오늘 흥했던 기술이나 지식이 내일 당장 폐기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사물이라니.”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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