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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 한 잎, 물결 두 잎...풀등해변엔 그렇게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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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 한 잎, 물결 두 잎...풀등해변엔 그렇게 꽃이 핀다

입력
2014.10.0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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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에서 빠름은 반칙입니다’ 청산도 슬로길 안내책자의 점잖은 경고다. 그렇다고 반칙일 거 까지야. 느린 섬 청산도를 여행하려면 조급함부터 내려놓으란 말이겠다. 전남 담양의 창평, 신안의 증도와 함께 아시아에서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완도의 청산도는 걷기 길만도 11개 코스 100리(42.195km)에 달한다. 주어진 시간만큼 천천히 둘러보며 느림의 미학을 안고 오겠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다.

전남 완도군 청산도 신흥리 풀등 해변으로 꽃잎처럼 얇게 파도가 밀려들고 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전남 완도군 청산도 신흥리 풀등 해변으로 꽃잎처럼 얇게 파도가 밀려들고 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삼치 고등어 파시의 추억을 되살린 안통길

청산도 여행객은 대부분 도청항에 내려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촬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조금 더 짜임새 있게 보려면 파시문화거리를 먼저 들르는 게 유익하다. 여객터미널 바로 뒤편 골목 ‘안통길’이다.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됐지만 청산도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고등어와 삼치 파시로 이름을 떨쳤던 곳이다. 한때 하루 3,000명이 유입될 정도로 성황을 이뤘던 좁은 골목을 청산의 역사와 파시의 흔적으로 채웠다. 시기적으로는 찬바람이 돌 무렵, 지금이 딱 제철이지만 포구는 옛날처럼 들썩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여수 추자 등에 근거를 둔 대규모 선단이 삼치의 먹이가 되는 멸치를 싹쓸이 해 가는 바람에 삼치잡이는 겨우 명맥만 잇고 있다.

청산도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지에 모형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청산도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지에 모형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하루 3,000명까지 몰려 붐볐다는 삼치 고등어 파시 골목엔 이제 추억의 흔적만 남았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하루 3,000명까지 몰려 붐볐다는 삼치 고등어 파시 골목엔 이제 추억의 흔적만 남았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청산도 향토역사문화전시관. 청산의 아름다움을 담은 사진을 보면 어디를 둘러봐야 할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청산도 향토역사문화전시관. 청산의 아름다움을 담은 사진을 보면 어디를 둘러봐야 할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안통길 중간쯤에서 왼편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향토역사문화전시관이다. 엉뚱하게도 이름은‘청산면사무소’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 건물이었고, 이후 면사무소로 쓰이다가 다시 전시장으로 개조했다. 내부에는 약 6년여에 걸쳐 청산도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온 향토사진작가 김광섭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청산팔경의 풍경과 청산주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디를 봐야 할 지 청산도 여행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전시장 바로 옆 ‘느림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일정을 짜는 여유를 부리는 게 청산도 여행의 시작이다.

‘파도꽃’ 피는 화랑길에선 글자랑 하지 마라.

도청항에서 해안도로를 따로 언덕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 ‘여인의 향기’ 촬영지다. 사진으로 워낙 많이 봤기 때문에‘봄의 왈츠’세트장인 ‘언덕 위의 하얀집’이 풍경의 정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아름다움은 드라마 세트가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있다. 언덕 오른편은 바다가 살짝 안쪽으로 패여 곡선해변이 아름다운 도락 마을이고, 왼편은 당리와 읍리 마을이다. 시원한 풍경으로는 도락 마을이지만 아기자기한 맛은 당리와 읍리다. 당리와 읍리 마을은 딱히 정한 규정이 없는데도 빨갛고 파란 원색 지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새마을운동 때 초가를 없애고 3원색으로 지붕을 칠했다는 것에서 유래를 찾는가 하면, 섬에 업자는 한정돼 있고 여러 색의 페인트를 구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어쩐지 두 번째 해석에 더 정감이 간다. 봄에는 유채꽃과 청보리가 짙은 대조를 이루는 언덕에 지금은 코스모스가 만발하다. 당리 마을을 연꽃처럼 감싸고 있는 진성을 따라 한 바퀴 돌면 마을과 언덕이 시시각각 새로운 풍광으로 펼쳐진다.

봄이면 유채꽃과 청보리가 만발하는 '봄의 왈츠'촬영지엔 지금은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봄이면 유채꽃과 청보리가 만발하는 '봄의 왈츠'촬영지엔 지금은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봄이면 유채꽃과 청보리가 만발하는 '봄의 왈츠'촬영지엔 지금은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봄이면 유채꽃과 청보리가 만발하는 '봄의 왈츠'촬영지엔 지금은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범바위에는 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맑은 날은 거문도와 제주도까지 보인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범바위에는 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맑은 날은 거문도와 제주도까지 보인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언덕 위의 하얀집’을 지나면 슬로길 1코스가 이어진다. 청산도 주민들은 이 길을 화랑포길이라 부른다. 꽃 화(花)에 물결 랑(浪)자로 쓴다. 오른편으로 도락리를 내려다 보고 한 굽이 돌면 또 다른 바다가 나온다. 가파른 언덕아래 푸른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파도에 물살이 뒤집어지는 모습을 청산도 어른들은 ‘꽃이 핀다’고 시적으로 표현한단다. 화랑길은 바로‘파도 물결 꽃이 피는 길’이다. 그래서 청산도에선 섣불리 글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화랑길이 끝나는 지점에 낯선 초가 무덤이 있다. 청산도에서만 볼 수 있는 초분(草墳)이다. 망자의 입장에선 찌든 육신으로 조상 품으로 바로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고, 유족의 입장에서도 바로 매장하는 것은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한 무덤 양식이다. 시간상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점에 있는 초분은 3~5년간 관리한 후 좋은 날을 골라 다시 매장한다. 청산도에선 지금도 초분을 하는데, 미신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효자집안, 잘사는 집안, 형제간 우애가 깊은 집안이라고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청산도에는 바다에도 다랑논이 있다.

청산도는 섬이면서도 섬이 아니다. 청산팔경으로 꼽은 8개 명소 중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산 이름에서 따왔다. 당리 읍리 양지 등 청산도의 마을은 7개의 산들이 연꽃처럼 감싼 것처럼 옴폭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당연히 농업이 주업이고, 경작지는 다랑논이다. 그 중 일부는 청산도에만 있는 ‘구들장논’이다.

양지마을의 구들장논에서 본 청산도의 다랑논은 청산 주민들의 땀과 지혜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양지마을의 구들장논에서 본 청산도의 다랑논은 청산 주민들의 땀과 지혜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양지마을의 한 농가에서 늙은 호박을 돌 담장 위에 올려 말리고 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양지마을의 한 농가에서 늙은 호박을 돌 담장 위에 올려 말리고 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양지마을의 구들장논에서 본 청산도의 다랑논은 청산 주민들의 땀과 지혜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양지마을의 구들장논에서 본 청산도의 다랑논은 청산 주민들의 땀과 지혜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산비탈을 파내 맨 아래에 돌을 깔아 수로를 만들고, 그 위에 모래 진흙을 5~6회 다져 방수작업을 하고, 또 그 위에 벼가 뿌리내릴 흙을 채운 게 대략적인 구조다. 논바닥 아래에 구들장 형태의 수로를 만든 독특한 방식이다. 마을 공동작업으로 1평을 만드는데 1년이 걸렸고,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400년 전부터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구들장논은 문화인류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올 4월 한국에서 최초로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농업유산으로 인정받았다. 규모는 인증기준에 못 미치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고, 청산도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한 결정이었다. 양지마을 뒤편 구들장 논에서 본 가을 들판은 봄철 유채밭 못지않게 노란 물결이다. 청산주민의 땀과 지혜로 느리게 일궈낸 눈물겹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감자 칩처럼 얇은 파도가 신흥리 풀등 해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다. 양지마을에서 본 다랑논에 빗대, 어떤 이는 이 모습을 ‘청산도에는 바다에도 다랑논이 있다’고 표현한다. 물이 들어올 때 맞바람이 불면 마름모꼴 물결이 만들어진다는데 끝내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감자 칩처럼 얇은 파도가 신흥리 풀등 해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다. 양지마을에서 본 다랑논에 빗대, 어떤 이는 이 모습을 ‘청산도에는 바다에도 다랑논이 있다’고 표현한다. 물이 들어올 때 맞바람이 불면 마름모꼴 물결이 만들어진다는데 끝내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감자 칩처럼 얇은 파도가 신흥리 풀등 해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다. 양지마을에서 본 다랑논에 빗대, 어떤 이는 이 모습을 ‘청산도에는 바다에도 다랑논이 있다’고 표현한다. 물이 들어올 때 맞바람이 불면 마름모꼴 물결이 만들어진다는데 끝내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감자 칩처럼 얇은 파도가 신흥리 풀등 해변으로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다. 양지마을에서 본 다랑논에 빗대, 어떤 이는 이 모습을 ‘청산도에는 바다에도 다랑논이 있다’고 표현한다. 물이 들어올 때 맞바람이 불면 마름모꼴 물결이 만들어진다는데 끝내 그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양지마을 조금 아래 신흥리 해변에선 하루 두 차례 또 다른 다랑논을 볼 수 있다. 풀등으로 밀려드는 파도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모습이다. 풀등은 ‘강물 속에 모래가 모여 쌓이고 그 위에 풀이 우북하게 난 곳’이니 해변의 풀등은 단단한 모래층이 넓게 펼쳐진 곳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밀물 때면 풀등으로 밀려드는 파도가 묽은 쌀가루 반죽처럼 얇게 퍼지며 끝없이 감자칩 모양의 물결을 만든다. 첫날은 날이 저물어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에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나갔다. 느리게 밀려드는 물이 넓은 모래 사장을 다 채우려면 한참은 걸릴 듯 했다. 예약한 배 시간은 다가오고 숙소에서 짐을 챙겨놓고 다시 나갔는데 아뿔싸! 풀등은 이미 바다가 돼 있었다. 도청항으로 향하면서 뒤늦게 자책한다. 한번에 청산을 모두 보려는 자체가 과욕이었음을. 안내책자에 경고문 하나 더 보태야겠다.‘청산도에선 욕심도 반칙입니다’. 욕심 하나 내려놓고 진한 아쉬움 한줌 움켜쥐고 완도로 돌아오는 배에 올랐다.

청산도=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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