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평장(都都平丈)’이라는 말이 있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 공자가 ‘욱욱호문(郁郁乎文)’이라고 말했는데, 한 무식한 훈장이 이를 ‘도도평장(都都平丈)’으로 읽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餘)같은 책에 나오는데, 무식한 훈장이 학생들을 잘못 가르치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그 전문은 공자가 “주나라는 이대(二代:하ㆍ은나라)를 귀감으로 삼았으니, 찬란하도다 그 문화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노라(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吾從周)”라는 것이다. 여기의 욱욱호문(郁郁乎文)은 ‘찬란하도다 주나라의 문화여’라는 뜻인데, 무식한 훈장이 비슷하게 생긴 도도평장(都都平丈)으로 읽었다는 것이다. 공자가 주나라의 문화를 찬란하다고 감탄하면서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노라”라고 선언한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공자의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공자는 동이족 국가인 은(殷)나라 사람의 후예라는 의식이 강했다. 공자가 살던 때는 주나라가 동쪽으로 이주한 동주(東周ㆍ서기 전 770~서기 전 256년)시대로서 보통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이때는 주나라의 영향력이 미미해지고 각지의 제후국들이 사실상 독립국가 상태로 패자(覇者)를 꿈꾸던 때였다. 공자는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던 노(魯)나라 사람이었는데, 산동반도 역시 동이족이 살던 지역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을 무너뜨렸는데, 공자는 이 사실을 수긍할 수 없어서 고민했다.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 ‘공자세가’가 공자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기록인데, 사기 ‘공자세가’를 비롯해서 공자에 대한 여러 기록을 검토하면 공자 나이 서른네 살 때인 노(魯) 소공(昭公) 24년(서기 전 518년) 노나라의 실력자였던 맹리자(孟釐子)가 죽었다. 그 후 그 후계자가 된 맹의자(孟懿子)와 그 동생 남궁경숙(南宮敬叔)이 공자를 찾아와 예(禮)를 배웠다고 한다. 이 무렵 남궁경숙이 노 소공에게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 싶다”고 청했는데, 이는 주나라의 수도였던 낙읍(洛邑), 즉 지금의 낙양(洛陽)을 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노 소공은 이를 받아들여 말 두 마리가 끄는 수레 한 대와 심부름 할 동자 한 명까지 딸려 보냈다. 그래서 공자는 꿈에도 그리던 주나라의 수도 낙양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 답사를 마친 공자가 남긴 말이 “찬란하도다 주나라의 문화여”라며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노라”라는 것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의 문화를 찬란하다고 한 이유는 “주나라는 이대(二代)를 귀감으로 삼았기 때문(周監於二代)”이라는 것이다. 이대(二代)란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를 뜻하는데, 주나라가 하(夏)나라는 물론 자신이 무너뜨린 은(殷)나라의 문화까지 계승했으니 공자가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보통 하(夏)나라 마지막 임금 걸왕(桀王)이 폭군이기 때문에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무너뜨렸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이 폭군이기 때문에 주나라 무왕(武王)이 무너뜨리는 역성혁명을 단행했다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쉽기 때문에 폭군이냐 아니냐 여부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공자도 주(周)나라를 인정할 것인가를 가지고 무수히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다 낙양을 답사한 후 주나라가 하ㆍ은나라의 문화를 계승했다고 보고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노라(吾從周)”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계승문제는 이렇게 중요하다.
최근 미국 시카고대에서 공자학원 퇴출 결정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 대학 교수 100여명이 “공자학원이 중국 정부의 선전수단으로 활용되면서 학문의 자유를 짓밟는다”고 비난한데 따른 조치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공산당의 공식 구호는 ‘림표(林彪)와 공자(孔子)를 비판한다’는 뜻의 ‘비림비공(批林批孔)’이었다.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노예제도를 복귀시키려는 반동사상이고, 모택동의 후계자였던 림표 역시 ‘지주ㆍ자산계의 전제(專制)’를 복귀시키려 한 반동이라는 비판이었다. 그랬던 중국공산당이 이제는 공자를 문화수출의 매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제1회 전 세계 공자학원일 기념식에 “공자학원은 중국의 것일 뿐 아니라 세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제자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夏)나라 사람은 동쪽계단에 빈소를 차렸고, 주(周)나라 사람은 서쪽 계단에 빈소를 차렸고, 은(殷)나라 사람은 양쪽 기둥 사이에 빈소를 차렸다. 지난밤에 나는 꿈에서 양쪽의 기둥 사이에 앉아 제사를 받았다. 나는 은나라 사람에서 비롯되었다.(予始殷人也)” “은나라 사람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나는 은나라 사람의 후예’라는 말이다. 향년 일흔 셋에 세상을 떠난 공자의 유언은 ‘나는 은나라 사람의 후예’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미 버린 지 오래인 동이(東夷)를 공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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