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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도시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

입력
2014.09.2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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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개봉한 프랑소와 트뤼포의 영화 번의 구타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의 시점에서 파리의 풍경을 조망하며 시작된다. 영화가 서사적 측면에서 사고뭉치 앙투안의 일상을 다룬다면 시각적 측면에서 강조되는 것은 속도다. 풍경은 속도에 따라서 다른 식으로 경험된다. 걸을 때와 뛸 때 그리고 자전거를 탈 때와 자동차에 몸을 싣고 있을 때 거리의 풍경이 각각 다른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늦은 밤 속도계를 무시한 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보이는 한강의 풍경과, 월요일 아침 꽉 막힌 출근 행렬에 끼인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풍경은 다르다. 주말,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 없이 메워진 명동 한복판에서 경험하는 도시와 평일의 늦은 밤 불꺼진 여의도 거리에서 경험하는 도시는 다르다.

영화 번의 구타가 보여주는 도시의 풍경은 이런 극단적 속도들의 사이 어딘가에 속한다. 그것을 인간의 속도 혹은 인간적 속도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대체로 뛰어다니는 앙투안의 속도를 현실있게 담아내는데 집중한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빛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들의 모습에 매료되었다면, 60년대 누벨바그 감독들은 도시 속 인물들의 속도, 빨개진 얼굴로 헐떡이며 내달리는 속도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관련이 있는지 몰라도 비슷한 시기 나온 장 뤽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의 프랑스어 원제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숨이 찬, 혹은 숨이 가쁜 이라는 뜻이다. 그 영화 속 인물들 또한 앙투안처럼 끊임없이 걷거나 뛰며 도시를 맴돈다. 관객들은 그들의 등 뒤를 바짝 쫓으며 등장인물과 같은 속도로 도시를 경험한다. 그렇게 경험되는 도시 파리는 적당한 속도의 산책과 드라이브가 가능한, 적당히 붐비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공간이다. 물론 그건 이제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20세기라는 이름의 좋았던 옛 시절에 더 가깝지만.

걷거나 뛸 수 있으며, 적당히 기분 좋은 속도로 드라이브할 수 있는, 너무 텅 비지도 너무 꽉 차지도 않은 거리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도시 파리는 더 이상 없다. 단지 파리 뿐 아니라 현실의 도시에서 더 이상 그런 경험을 기대하는 것은 힘들어졌다. 파리같이 전세계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적 대도시에서는 특히 그렇다. 물론 여전히 영화 속 그 파리가 약간은 남아 있을 것이다. 19세기의 건물들, 공원들, 포석이 깔린 뒷골목과 끝없이 펼쳐진 카페테리아의 파라솔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백만장자와 관광객들의 것이다. 집값은 끝을 모르고 오르고, 시내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터져나갈듯이 붐빈다. 평범한 도시 사람들에게 위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도시적 경험이란 일상보다 예외적 사치에 가깝다. 물론 그것조차 이제는 빼곡한 CCTV와 구글 스트리트 뷰에 포획된, 이십사시간 통제되고 관리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같은 경험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한편 시내의 거주지역이 대부분 대형 아파트단지로 바뀌어버린 서울의 경우, 도시적 경험 자체가 성립불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한국의 대형 아파트단지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유사 마을-공동체로서 도시 속에 섬처럼 떠있다. 그런 공간에서 경험하게 되는 삶은 집을 나서자마자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익명의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속에 파묻히게 되는 도심의 삶과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도시적인 경험이 불가능해지거나 흔치 않은 특권이 된 상황에서, 도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지난 시기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도시를 찬미했던 이유는 그것이 가진 해방적인 측면 때문이다. 도시의 익명성, 뒷골목과 샛길이 그것을 상징한다. 도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지 않은 장소들이 끊임없이 재발견된다. 왜냐하면 도시는 늘 사람들로 가득하고, 거리는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각지대 없는 CCTV의 감시와, 영원히 지속되는 러시아워와, 감당할 수 없는 주거비용과, 병원이나 감옥처럼 통제되는 시설들로 이루어진 최근의 도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이 도시는 (여전히) 그 도시인가? 아니라면, 이 도시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도시 안에서 숨거나 도망칠 권리를 완전히 빼앗겨버렸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때 도시 뉴욕의 삶을 매혹적으로 그려내던 감독 우디 앨런은 언젠가부터 유럽의 도시를 떠돌며 노스텔지어로 가득한 관광 영화같은 것들을 찍고 있다. 왜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한때 그게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뉴욕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도시판타지에 지나지 않으며, 요즘 도시의 진실은 백만장자와 관광객들 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악의 교통 체증 속에 갖혀버린 최고급 리무진 안에서 영화의 대부분이 진행되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코스모폴리스는 21세기의 도시에 관한 유일하게 말이 되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도시에 있을 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동행위에 소모한다. (하여 스마트폰은 필수품이다.) 도시 안에서 우리는 끝없이 이동하지만, 더 이상 자유롭게 걷거나 뛰지 못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동상태 속에 갇혀 있다. 한때 찬미되었던 움직임은 이렇게 아이러니가 되어 돌아왔다.

김사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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