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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화재 발생 땐 속수무책...대한민국 화상치료의 현주소

입력
2014.09.2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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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가스 흡입 환자 이송 와도 해독제 있는 대학병원 많지 않아

화상외과 인기 없어 전문의 부족 / 화상센터 둔 대학병원은 단 1곳

지난달 23일 서울 송파구 제2롯데월드에서 대규모 화재 대응훈련이 실시됐다. 훈련에 참가한 1,203명은 단 5분 만에 건물에서 탈출했다. 사전에 계획된 가상훈련처럼 실제로 화재 발생 시에도 이 인원들이 무사히 건물을 빠져 나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해도 화재 시 유독가스를 마셔 생긴 흡입 화상을 치료하지 못하면 대형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

대학병원 등 유독가스 해독제 없는 병원 ‘태반’

이처럼 도시가스 폭발, 지하철 등 공공시설 방화, 초고층 빌딩 화재 등으로 수많은 인명이 흡입화상을 입었을 때 제대로 된 화상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유경탁 한전의료재단 한전병원 외과과장은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와 같은 화재사건이 일어나 유독가스를 마신 대규모 흡입화상 환자들이 발생하면 치료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시안화수소(HCN, 청산가스), 일산화탄소(CO) 등이 포함된 유독가스를 마실 수밖에 없는데 대학병원 등에 유독가스를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가 구비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실제로 유독가스를 마신 환자가 응급실로 들어왔는데 해독제를 구하는데 3일이나 걸렸다”고 토로했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화재로 인한 사망자의 60%가 질식사로 고양종합터미널 화재와 장성요양병원 화재 당시 사망한 29명 모두 질식사였다. 이처럼 화재 발생 시 유독가스로 인한 사망과 피해가 증가하고 있지만 의료현실은 무방비 그 자체인 것이다.

실제로 권역외상센터를 운영 중인 한 병원에 화재가 생겼을 때 시안화수소 등 유독가스를 마신 환자치료를 위해 해독제가 구비돼 있느냐는 물음에 병원 관계자는 “유독가스 해독을 위한 해독제가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답했다.

범국가적 화상치료시스템 미비, 화상치료 전문의 부족, 피부이식재 고갈 등으로 대형 화재가 발생하면 국가적 재앙을 겪을 수 있어 정부차원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한림대의료원 제공
범국가적 화상치료시스템 미비, 화상치료 전문의 부족, 피부이식재 고갈 등으로 대형 화재가 발생하면 국가적 재앙을 겪을 수 있어 정부차원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한림대의료원 제공

권역외상센터에 화상치료 전문의 부재

화상치료를 위한 의료시스템 부재도 문제다. 보건복지부는 중증외상환자의 신속한 치료를 위해 2012년부터 권역외상센터를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권역외상센터는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다발성 손상, 과다출혈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권역외상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에서는 “화상치료 전문의가 없어 화상환자가 들어올 경우 화상전문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고 밝혔다. 화상도 엄연히 외상인데 치료에 포함돼 있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복지부 응급의료과 관계자는 “화상도 익사, 교통사고와 같이 외상에 포함되지만 권역외상센터에서는 교통사고 등 외상치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외상센터에서 화상치료에 소극적인 것은 화상치료 전문의를 구하기 어렵고 병원수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복지부도 외상과 화상을 함께 치료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며 “최소한 소방당국과 연계해 화상환자 발생 시 적극적인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화상치료 전문의 부족으로 인한 의료공백도 환자치료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재 국내 대학병원 중 화상센터를 보유하고 있는 병원은 한림대한강성심병원이 유일하다. 허준 한림한강성심병원 화상외과 교수는 “화상외과 자체에 대한 인기가 없어 지원하는 전공의도 없고 의과대학에서 화상관련 교육도 2시간 밖에 하지 않는다”며 “화상치료 전문의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일병원이 아닌 국가차원의 문제해결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의료계 현장에서도 “화상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없는 의사가 태반인데 화상환자가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 대학병원에서 이들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허 교수는 또 “야당 국회의원이 여수와 광양지역 산업단지에서 폭발사고가 잦다며 관련법을 개정해 이 지역에 화상전문응급의료센터를 설립하려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건물은 올릴 수 있어도 거기서 일할 화상치료 전문의를 구할 순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현실을 무시한 탁상행정식 대안이 아닌 국민건강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체피부 등 피부이식재 고갈…대형 화재 나면 속수무책

대형화재로 피부이식술이 필요한 급성 화상환자가 대규모로 발생해도 큰 문제다. 현재 국내에서는 급성 화상환자에게 이식할 사체피부 수급난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사체피부 수급난이 심각해 일반 중증 화상환자들이 이식재를 기다리며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면 사망자가 속출할 위험이 크다. 급성 화상환자들은 대부분 넓은 범위에 화상을 입은 중증 환자로 제때 피부를 이식 받지 못하면 패혈증 등으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전욱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병원장은 “급성 화상환자의 경우 3, 4일 이내 사체피부를 이식하지 않으면 감염으로 인해 사망할 수밖에 없다”며 “인체조직기증이 활성화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주요 수입국인 미국이 피부이식재 해외수출을 줄여 수급난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피부이식재 원재료와 완제품의 91.5%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지난해 4월 미국 보스턴에서 발생한 ‘보스턴마라톤 테러사건’ 이후 자국 내 대형 테러에 대비해 해외 반출량을 줄이자 국내에 불똥이 튄 것이다.

화상 전문의들은 “지금처럼 피부이식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대형화재라도 발생하면 1주 안에 손도 써보지 못하고 환자들이 사망할 것”이라며 “턱없이 낮은 피부이식재 건강보험 수가를 올리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복지부는 “피부이식재 수입과 관련 민원이 제기 돼 건강보험 수가 인상 등 문제해결을 위해 다각적인 검토를 하고 있다”며 원론적인 답만 했다.

도심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당국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화재 현장에서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들이 화상치료시스템 전무, 화상치료 전문의 부재, 피부이식재 고갈 등의 원인으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되면 그때 보건당국은 어떤 말을 할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인재(人災)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수긍할 궁금하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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