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를 향하는 마음은 높아진 가을하늘 만큼 상큼하다. 나는 무더웠던 긴 여름, 땀이 베인 손끝으로 정성을 다했던 작품을 갤러리에 걸었고 오프닝 전에 호젓이 그림보기를 즐겼다. 하얀 벽의 넓은 전시장, 노르스름한 할로겐 조명, 부드러운 나무 플로어, 그림들은 좁은 작업실에서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내 마음을 적신다.
이제 내 손길을 떠나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은 감상자를 기다린다. 전시가 시작되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 시계추를 움직이며 조용히 그리고 느리게 갤러리 안을 걷는다. 그림 앞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정서에 서서히 젖어들거나 자기 내면의 변화감을 느끼는 정신적 가치를 경험하기도 하며,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느끼는 미적 가치의 시간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관람객들은 한 작품 한 작품 눈길을 맞추며 의미를 탐색한다. 작가의 표현세계가 무엇이었는지, 작품을 통해 작가를 알고 싶어 하거나, 숨은 그림을 찾아내려거나, 미처 몰랐던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인식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속삭이듯 수줍게 질문한다. 이 작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조심스레 작가로부터 작품의 설명을 듣길 원한다.
그러면 나는 먼저 어떻게 보이는지를 되묻는다. 그런데 사람들의 답변이 다양하다. 특히 있는 사물을 그대로 표현한 구상이 아닌 비구상의 작품들은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그림 속 꽃 속에 웅크린 태아가 보이기도 하고,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고도 하며 각자의 시선을 설명한다. 형상을 좇는 시각의 차이가 달라 흥미롭다.
특히 나의 백열등 전구를 꽃으로 표현한 그림 앞에서 사람들의 질문이 많아진다. 왜 전구를 그렸나요? “일상에서 무의미하게 지나쳐버리는 미물들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고 싶었어요. 빛을 내어주는 전구는 어둠을 밝히는 소중한 문명이고, 그 문명의 심연을 꽃으로 만든 빛으로 표현하여, 아름다운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답변과 다르게 전구를 그렸는데 열쇠구멍으로 보인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꽃으로 가득 채운 전구는 열쇠구멍이며 그 구멍을 열쇠로 열고 나가면 꽃으로 가득한 낙원이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는 해석이다. 작품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주는 다양한 해석이 고맙다. 또 서로 다른 해석을 보며 그 차이를 비교해 보는 즐거움이 크다.
이런 작품의 해석은 관람자의 성별, 지역, 기억, 가치관,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작품에는 작가가 심어놓은 의미도 있고, 감상자가 바라보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일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감상자들은 작가의 의도와 그 해석이 일치할 경우 매우 기뻐한다. 마치 그것이 정답인 듯 말이다. 하지만 미술품 감상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갤러리에 오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소 권위적인 분위기,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적잖이 주눅이 든다. 그 가운데에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작품을 해석하려 시도한다. 그런데 작가의 작품에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도 있지만 의미를 두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된 작품도 있다. 그것의 의미부여는 결국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몫이다.
관람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본다. 심리학에서 이야기 하는 인간의 ‘선택적 주의’, 즉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경향처럼, 관람에 있어서도 어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정답은 없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스스로 독자적인 생명체이며, 작품은 감상자의 시선과 체감 온도에 따라 같이 살아 숨쉰다.
현대의 시대는 기표의 시대라고 한다. 의미되는 내용, 즉 기의가 아니라 표현되는 단어의 소리인 기표의 시대이다. ‘헐’ ‘레알’ ‘트롤’ ‘봵’ 등등 무의미하게 들리는 단어들이 대표적이다. 예술작품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기의를 만들어 가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 될 것이며 자신의 맥락에 따라 자연스럽고 구속 없이 상상하는 해석의 자유는 예술작품 감상의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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