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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은 문 닫습니다" 신념으로 일궈낸 프랜차이즈 성공 신화

입력
2014.09.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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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 사업가

닭가슴살 요리법 5년 실험 후 '칙필라' 샌드위치 개발

독실한 기독교인

손님 제일 많은 일요일 휴무는 칙필라 매장의 철칙

동성애자 차별 스캔들

반동성애자 단체에 기부 드러나 게이 인권단체의 저항 받기도

시장과 정부가 맞설 때 보수주의자는 시장 편에 선다. 사업가인 트루엣 케이시는 시장보다 종교를 우선시했고, 이윤보다 성서의 계율을 중시했다. 그의 극단적인 종교 보수주의는 미국사회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두루 끼쳤다. 그의 부재가 '칙필라'의 경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거리다. AP 연합뉴스
시장과 정부가 맞설 때 보수주의자는 시장 편에 선다. 사업가인 트루엣 케이시는 시장보다 종교를 우선시했고, 이윤보다 성서의 계율을 중시했다. 그의 극단적인 종교 보수주의는 미국사회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두루 끼쳤다. 그의 부재가 '칙필라'의 경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거리다. AP 연합뉴스

‘칙필라(Chick-fil-A)’라는 미국의 유명 치킨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있다. 40여 개 주 1,800여 개 매장에서 닭가슴살 샌드위치와 치킨 너겟 등을 판매하는 곳이다. 완고한 기독교 전통을 고수하는 업체여서, 외식업체로는 드물게 일요일이면 전 매장이 문을 닫는다. 그러면서도 더 많은 매장을 지닌 KFC를 누르고 지난 해 매출 50억 달러로 미국 내 치킨 레스토랑 매출 1위를 기록했다(QSR). 좋은 재료와 기름을 쓰고 직원들이 “My Pleasure(기꺼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만큼 친절해서 패스트푸드라도 뭔가 다르다는, 비유하자면 같은 아이스크림이라도 ‘녹차아이스크림’같다는 평을 듣는 곳이다.(옐프-Yelp 라는 미국 레스토랑 평가 사이트에는 그런 소비자들의 평이 적지 않다.)

그 칙필라가 올해 초 뉴욕을 비롯한 북동부 지역 대도시에 매장 108개를 연내 개점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상당수 언론들은 물음표가 달린 기사들을 쏟아냈다. 칙필라의 보수성, 특히 공공연한 반(反)동성애 자본이 운영하는 식당을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고 자부하는 지역의 시민들이 과연 반길 것인가 하는 거였다.

미국 남부 조지아주에 본사를 둔 칙필라는 반동성애단체에 지속적으로 기부해왔고, 댄 케이시 회장은 2012년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혀 동성애자 및 인권단체 회원들의 불매운동 등으로 호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반면에 뉴욕 주는 주민 60%가 동성혼인 합법화에 찬성하는 지역으로 2011년 법으로 그 권리를 인정했다. 지난 해 7월, 혼인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한 혼인보호법(DOMA)이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직후에도 댄 케이시 회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Sad Day for the Nation(국가적 비극의 날)”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 칙필라의 창업주가 현 회장의 아버지인 사무엘 트루엣 케이시(Samuel Truett Cathy)다. 소수자 인권에 예민한 이들은 편협한 종교 도그마티스트로 그를 알지만,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힘으로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미국의 기업인으로 그를 기억한다. 영화 ‘배트맨 리턴스’의 자동차 배트모빌을 사들인 별난 자동차 수집광으로 그의 이름을 들어본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자선과 기부, 사내 복지에 모범적인 기업인으로 그를 소개한 경영 지침서들도 있다. 그가 9월 8일 숨을 거뒀다. 향년 93세.

트루엣 케이시는 칼라 퍼플의 저자 앨리스 워커와 한 동네나 다름없는 미국 조지아주 이턴튼 출신이다. 1921년 3월 14일 출생. 4살 무렵 애틀란타로 이사해 거기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1929년 대공황 직후 가족 농장은 빚에 넘어갔고, 가계는 어머니가 책임져야 했다고 한다. 그는 8살 무렵 집 앞마당에 간이 테이블을 펼쳐놓고 코카콜라를 팔아 6병들이 한 박스에 25센트를 남겼고 신문 배달부로도 일했다고 훗날 자서전에 썼다. 35년 그의 가족은 주정부가 극빈층 공공주택사업으로 지은 집의 월세 67달러를 못내 판자집으로 이사했다. 그는 학비가 없어 대학에 못 갔다.

크게 자수성가한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듯이 그는 유년의 가난에서 의지와 성실 같은 노동윤리를 익혔고, 작은 돈벌이 경험을 통해 사업 노하우를 익혔노라 말하곤 했다. 어머니가 눈을 감은 모습을 본 건 당신이 관에 누웠을 때뿐이었다는 말도 그가 성실의 미덕을 설명할 때 자주 하던 말이었다.(뉴욕타임즈, 2014.9.8)

하지만 그의 가치관을 지탱한 뼈대는 성경이었다. 가난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 역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지키려던 신앙적 삶의 규율과 포개져 있다. 2004년 ‘디시즌 매거진’인터뷰에서 그는 “생계 때문에 일요일에도 일해야 할 때가 잦았지만 어머니는 라디오 복음방송이라도 들으려고 애썼다. 나는 12살 무렵부터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고 말했다.

46년 군 제대 후 그는 동생과 함께 애틀란타 교외인 하퍼빌에 간판도 없는 작은 식당을 연다. 개업 첫날 매출은 58.2달러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이듬해 식당 인근에 포드자동차의 애틀란타 공장이 들어서면서 그의 식당은 행운을 만난다. 가게가 너무 좁아 포드사 직원들이 ‘난쟁이 식당(The Dwarf Grill)’이라 불렀고, 그게 곧장 식당 이름이 됐다. ‘난쟁이 집(Dwarf House)’이라는 상호의 그 식당은 지금도 영업하고 있다. 그는 인색한 식당 주인이 아니었던 듯하다. 2006년 10월 포드사 애틀란타 공장이 철수하면서 포드 측은 긴 인연을 기념하며 마지막으로 생산한 승용차를 자동차 광 케이시에게 선물했다.

동생 벤이 사고로 숨지고 51년 두 번째로 문을 연 식당이 화재로 전소되는 등 불운도 있었지만 그는 61년 또 한 번의 결정적인 행운을 만난다. 델타항공에 음식을 납품하던 한 업체가 기내식 재료로 쓰기엔 너무 크거나 작은 닭가슴살을 대줄 테니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거였다. 케이시는 어머니에게서 배운 갖가지 요리법으로 5년 가까이 실험을 거듭했고, 더러는 식당 메뉴로 올려 손님들의 반응을 살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뼈 없고 껍질 없는 오리지널 닭가슴살 샌드위치였다. 그는 그 메뉴의 이름을 ‘칙필라’라 지었다.

67년 그는 갓 오픈한 애틀란타의 대형쇼핑센터 ‘그린 플라이어’내에 닭고기 패스트푸드 전문점‘칙필라’를 연다. 쇼핑센터에 음식점이 입점한 예가 없어 계약에 애를 먹었지만, 개업 첫 해 칙필라는 센터 내 단위면적당 최고 매출을 기록했고, 이후 대형 쇼핑몰에 음식점이 껴드는 거대한 트렌드가 만들어졌다. 칙필라의 독립 매장도 1986년에야 처음 등장했다.(블룸버그, 2014.9.8)

고객이 가장 많은 일요일에 문을 닫는 칙필라 매장의 철칙은 주일은 모두가 신앙과 가족과 이웃을 위해 써야 할 시간이라는 성서의 규율, 교회에 못 가 애닯아 하던 어머니의 기억에 따른 거였다. 그는 자신이 사업가로서 내린 최고의 선택을 ‘주일 휴무’라고 말했다.(2005, 메이컨 텔레그라프) “(일요일에) 사람들이 쇼핑몰로 몰려들어 주위가 온통 부산스러울 때, 당신은 칙필라 매장이 닫혀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건 신을 향한 우리의 고요한 간증(witness)이다.”(애틀란타저널)

20,30년대, 그리고 그 이후 거대한 성공신화를 일군 미국의 세계적 기업들과 달리 케이시의 칙필라는 직원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비교적 책임 있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큰 돈을 번 뒤 비로소 기부에 나서는 여느 갑부들과도 달랐다. 프렌차이즈 사업 성공 초기인 1973년 케이시는 ‘사원 장학프로그램’이라는 걸 만들어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청년들에게 진학 기회를 제공했다. 거기 들인 돈이 지금까지 약 3,200만 달러. 올해에도 175만 달러가 사내 장학금으로 제공될 예정이다.(chick-fil-a.com)

2008년 4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주는 미 대통령 자원봉사상 시상식장의 트루엣 케이시(오른쪽)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그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이웃'은 배척했다.
2008년 4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주는 미 대통령 자원봉사상 시상식장의 트루엣 케이시(오른쪽)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그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이웃'은 배척했다.

1984년부터는 ‘윈세이프(WinShape) 재단’을 설립, 다양한 복지사업들을 본격화했다. 대학 진학 장학금, 리더십 장학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었다. 어린이 보육시설을 만들어 불우 아동에게 가정을 제공하는 ‘윈세이프 홈 프로그램’이 시작된 건 87년부터다. 이는 일반 탁아소와 달리 아이들이 대학을 나와 자립할 때까지 정서적 재정적 도움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는, 한 마디로 전통적 의미의 가정을 주겠다는 장기 프로그램이다. 각각 두 명의 양부모(보모)가 24시간 거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이 시설은 현재 13곳으로 늘었고, 450여 명의 아이들이 보살핌을 받고 있다. 85년 시작된 ‘윈세이프 캠프’는 기독교 신앙과 공동체 윤리를 고양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매년 여름 약 1만8,000여 명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간다. 이혼 위기에 처한 가정의 결혼 상담, 교회 행사 지원 사업, 소녀들을 위한 여름 캠프 등도 재단 사업의 일부다. 2002년 출간한 자서전 에서 그는 “거의 매일 매 순간 우리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나눠줄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 우리의 시간을 줄 수도 있고, 사랑과 우리 자신을 줄 수도 있다. 나는 아무 조건 없이 뭔가를 나눠줄 때 큰 기쁨을 느낀다”고 썼다. 그는 “물질적 이익보다 종교적 원칙과 이웃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올바른 질서를 위한 삶이라는 제1원칙을 지킨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을 살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항상 내 식당 운영자들과 종업원들에게 지역사회에 기여할 것을 주문해왔다. 우리는 닭고기를 파는 사람 이상이 돼야 한다. 고객들의 삶의 일부로 살아야 하고, 우리를 먹고 살게 해준 이 지역사회의 일부로 살아야 한다.”(칙필라 홈페이지)

2005년 한 인터뷰에서 ‘칙필라의 직원이 되려면 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사업적 판단을 성서적 원칙에 기초해서 내릴 것을 주문한다. 그들이 어떤 신앙을 가졌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종교와 사업을 지나치게 연계하는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사람들은 내게 종교와 사업을 뒤섞지 말라고 하는데 내게 그 둘은 다른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케이시는 이웃이나 가족 구성원에게 비행이나 악행을 저지른 직원들에게는 엄격해서, 2012년 한 아시아계 손님의 영수증에 인종주의적 낙서를 한 종업원을 가차없이 해고한 일도 있었다. 신입사원 채용 인터뷰 때도 그가 중점을 두는 질문은 사생활과 관련된 거였다. “사생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업을 믿고 맡기느냐”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많은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칙필라를 가족기업으로 지키고자 애썼다. 철저한 무차입 경영으로 지분 투자를 받을 필요가 없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운영철학, 즉 주일 휴무와 재단 기부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NPR, 2014.9.8)

케이시는 2013년 경영권을 물려준 장남 댄 케이시에게도 절대로 기업공개를 하지 말 것을 충고했는데, 주주들이 이윤을 위해 기부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뉴욕타임즈는 전했다. 그는 1948년 결혼한 제닛 맥닐과 65년을 해로하며 1녀 2남과 손자 19명 증손자 18명을 얻었는데, 전국 매장의 주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칙필라의 동성애자 차별 스캔들은 2012년 당시 회장이던 장남 댄 케이시의 도발적인 인터뷰를 계기로 폭발했다. 동성애자 활동가들의 조사로 윈세이프재단이 반동성애자 단체에 지속적으로 기부를 해온 사실이 드러난 직후 댄은 ‘뱁티스트 프레스’인터뷰에서 “우리는 성서가 규정한 바의 가족을 중시한다.(…) 우리는 가족이 소유하고 또 운영하는 기업이고, 우리는 첫 아내와 결혼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게이 인권단체들은 전국 칙필라 매장 앞에서 항의 집회와 불매운동을 잇달아 열었고, 일부 진보진영 정치인과 대학들도 가세했다. 레즈비언으로 당시 뉴욕시의회 의장이던 크리스틴 퀸은 뉴욕에 단 하나 뿐이던 뉴욕대(NYU) 구내 칙필라 매장의 철수를 요구했고, 보스턴 시장이던 토머스 메니노는 댄 케이시 회장에게 공문 형식의 항의 서한을 보내 보스턴 시내 매장 불허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우리는 동성애자 결혼을 지지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의 신장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우리의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역사 유적지 벨트)에 차별을 위한 공간은 없으며, 당신의 회사를 위한 자리도 없을 것이다.”세계적 인형극 대부 짐 핸슨의 장녀인 핸슨컴퍼니 CEO 리사 헨슨도 페이스북을 통해 칙필라의 어린이 메뉴에 납품하던 머핏 인형 공급 계약 철회를 선언했다.

칙필라는 그 직후 “우리는 종교나 인종, 성과 성적 지향과 상관없이 모든 고객을 존경과 예의로 대한다는 오랜 전통을 고수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동성 결혼 문제는 정부와 정치의 영역에 맡겨두자”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스캔들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댄 케이시 회장은 ‘애틀란타 저널 컨스티투션’ 인터뷰에서 “나와 아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그들 역시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말했지만, 끝내 아버지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칙필라의 매출은 2009년 30억 달러에서 2년마다 10억 달러씩 늘어났다.(NPR, 2014.9.8)

9월 현재 칙필라는 뉴욕대 구내 매장 외에 단 한 곳의 신규 매장도 뉴욕 주 안에 열지 못하고 있다. 메사추세츠 주에는 3곳이 있지만 보스턴에는 발도 못 부쳤다. 미시간에도 단 1곳 뿐이고, 캘리포니에에는 70개의 매장이 있지만 샌프란시스코에는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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