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와 싸우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때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만
비로소 한국 천주교회의 얼굴 됐다는 자부심...그런데 오래가지 못해...
요즘 나를 뜯어 고치려는 기계 소리가 요란합니다. 지금은 마무리 단계에 있는데 도대체 내가 아닌 것 같아요. 전에 나는 아름다운 숲에 둘러싸여 있었지요. 그런데 한국 사회가 언젠가부터 개발과 성형의 나라가 되면서, 사람은 물론 자연 환경까지도 뜯어 고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 마음대로 뜯어 고치면 안 되듯,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인 나도 자본의 욕심대로 뜯어 고치면 안 되겠지요.
나는 조선 말기 고종 때 프랑스 선교사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 감독을 맡아 세워졌어요. 1892년 착공해 1898년 5월 29일 축성됐답니다. 120여 년 전의 일이지요. 그러니 그 긴 세월 내가 듣고 본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이 노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조선 땅에 태어났지만 주인은 프랑스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굴곡진 역사에 깊이 참여하지 못했어요. 프랑스인들은 조선의 슬픈 역사, 고난의 역사를 깊이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 특히 1935년부터 나는 부끄럽게도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했어요. 프랑스 주교가 신사 참배를 권유하고, 매달 첫 주일에는 일왕을 위해 성당에서 기도하고 일왕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강론도 했어요. 참으로 비통한 시절이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얼마 있지 않아 동족끼리 피를 흘린 전쟁이 끝나자 세상은 독재자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포악이 남긴 상처가 깊었는데, 일제에 협조하던 무리들이 정권을 잡더니 국민을 총칼로 억눌렀어요. 참으로 마음이 아팠어요.
하지만 1970년대, 박정희가 유신 독재의 칼을 휘두를 때, 가난한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나에게 왔어요. 성모상 앞에서 유신 체제 타파를 위한 양심 선언을 하고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가기 직전에 여기서 미사를 봉헌하고 하느님께 청원할 때, 매우 뿌듯했어요. 많은 신자들이 모였고, 그들은 진심으로 한국의 인권 회복과 민주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무죄로 확인되었지만 1974년 민청학년과 인혁당 사건 관련 가족들, 그리고 많은 청년학생 시민들이 나를 찾아 와 독재에 항거하고 불의를 고발했지요. 그분들은 민주와 민족을 생각하고 자유와 통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절실한 기도를 반드시 하느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 확신했어요.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987년은 더욱 감격스러운 한 해였어요.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님이 대학생 박종철을 고문 치사한 사건을 폭로했습니다. 그 뒤로 6월항쟁이 불같이 타올랐지요. 명동성당에서 4박5일을 지새며 전두환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쳤던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청년들의 선명하던 눈빛이 그립습니다. 독재와 싸우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때, 여러 가지로 힘들었지만 내가 비로소 한국 천주교회의 얼굴이 되었구나, 하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답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오래가지 못했어요. 교구장 한 사람이 바뀐 것으로 그렇게 상황이 나쁘게 될지 몰랐어요. 이제는 나를 찾는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칭 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신자들이 내 앞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어요. 참으로 어이가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요사이는 더 늙은 것 같아요.
성당은 절대자와 만남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집입니다. 어느 종교든 성전에서는 자신을 정화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빌기도 하고, 또 억울한 일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내가 그런 곳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다시 한국천주교회의 얼굴, 민주화의 성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참, 40년 전 9월 26일 오늘은 바로 여기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첫 번째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발족한 날입니다. 독백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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