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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곤, '홍콩의 히딩크'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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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곤, '홍콩의 히딩크'로 피어나다

입력
2014.09.2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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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인천 아시안게임 무대에 홍콩 남자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한국과 16강전에서 맞섰던 김판곤(45) 감독. 비록 25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이날 경기에서 0-3으로 패하며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슈팅 수 0-16의 압도적 열세 속에서 단 한 점의 실점도 하지 않았던 전반전의 투지는 강렬했다.

자연히 홍콩 대표팀을 이끌고 아시안게임에 나선 김판곤 감독의 사연에 관심이 쏠렸다. 사실 김판곤 감독에게 홍콩은 한국보다 더 많은 기회를 준 '기회의 땅'이다. 프로 3년 차 때 정강이뼈가 완전히 두 동강 나는 골절상을 당해 일찌감치 선수 인생에서 내리막 길에 들어선 그는 30대에 막 접어 든 2000년, 지도자의 꿈을 품고 홍콩으로 향했다. 더블 플라워 클럽의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다 지도력을 인정 받아 프로팀 레인저스의 감독을 맡았다.

2005년, 김 감독은 홍콩에서의 성과를 안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K리그 부산 아이파크는 그에게 수석코치 자리를 내줬다. 1년여가 흐른 2006년, 생각보다 빨리 감독 대행직을 맡게 됐다. 이안 포터필드(영국) 감독이 해임되면서다.

사령탑을 맡은 직후인 2006년 7월, 기자와 만났던 김 감독은 "경기만 가르치고 지휘하는 코치(coach)가 아닌 팀 전체의 틀을 잡고 장기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매니저(manager)가 되고 싶다"고 털어놨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하지만 국내 프로축구는 그의 로드맵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두 번 감독대행을 맡았고, 그 때마다 성적이 수직 상승해 '판곤 매직'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지만 구단은 끝내 그를 정식 감독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미련 없이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한 나라의 축구 시스템을 총괄하며 '매니저'의 꿈을 이뤘다.

'홍콩의 히딩크'라는 별명에서 느낄 수 있듯, 홍콩 내 김 감독의 위상은 대단하다. 각급 대표팀 감독뿐만 아니라 기술위원장 직까지 겸임하고 있는 총감독이다. 사실상의 홍콩 축구의 전권을 쥐고 있는 실세다. 연봉도 축구협회가 아닌 국가에서 받고 있다.

그런 김 감독은 홍콩 축구계의 '무한 신뢰'를 등에 업고 홍콩 축구의 10년 뒤를 그리는 '피닉스 프로젝트'를 직접 계획해 시행 중이다. 홍콩의 어느 곳에서든, 언제든, 누구든 축구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든 뒤 넓어진 저변을 토대로 엘리트 축구의 발전을 이끌겠다는 구상이다.

2009년부터 시행 된 이 프로젝트는 벌써 반환점에 이르렀고, 서서히 국제 무대에서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랭킹 164위의 홍콩 축구가 한국을 지금 당장 넘어설 수는 없지만, 홍콩 축구계가 김판곤 감독에게 보여준 '신뢰와 기다림'의 가치는 분명 한국 축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김형준기자 mediabo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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