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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하고

입력
2014.09.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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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서 오래 머무는 경우가 있다. 살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거나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이 있어서다. 진안에서 몇 주를 보낸 것은 시를 쓰기 위해서였다. 다른 풍경을 가슴에 품으면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루 한 번 마이산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그 소원이 이뤄질 것 같아서 찾아간 땅이었다.

오래 그곳에 지내는 동안 술 친구가 내려온 적 있었는데, 그 친구를 마중하러 진안 버스터미널에 나가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진안군내를 도는 버스가 터미널 앞에 도착하고 남자와 여자가 내렸다.

둘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닌 듯 적당히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정확히는 남자가 터미널 입구에 남았고 여자는 어딘가로 가는지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큰 가방을 들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여행을 온 듯 보였다. 여자는 고맙다는 말을 두어 번 남겼고, 남자는 아닙니다 라는 말을 두 번 하면서 둘은 그렇게 헤어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라 남자가 하늘을 한번 보고 해맑게 크게 웃더니 여자가 들어간 안쪽으로 따라 들어가는 거였다. 그때부터 남자는 여자가 표를 끊는 모습과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과 버스에 오르는 모습까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훔쳐본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그렇기 말하기엔 보기 드물게 얼굴 기운이 맑고 고운 사람이라서 그렇게까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난 갑자기 둘이 어떤 사이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무슨 감정이 오갔으며 왜 남아 있는 사람 마음이 한 여자의 뒷모습으로 기우는 것인지 궁금하고 또 궁금해 머릿속이 부글거렸다. 마침 친구가 탄 버스가 도착했으므로 그 궁금증의 가지는 그것으로 더 자라지 않았다.

친구는 하루만 있기로 했으나 마이산의 정기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며 하루를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가 떠나던 날이 되어 터미널에 갔을 때 친구에게 물 한 병을 사기 위해 터미널 안쪽 가게에 들어갔다 나오다가 그 남자와 한 번 더 마주쳤다. 그 남자는 이번에도 가방을 들고 있는 다른 여자와 작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자, 저것 좀 봐봐. 저 남자랑 저 여자 말이야. 저렇게 두 사람이 헤어지지. 그런 다음, 남자가 여자가 하는 행동을 하나하나 바라보게 될 거야.”

“뭔 소리야? 그걸 어떻게 알아?”

“저 남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거든.”

친구가 아는 사람이냐고 했지만 나는 표정만 봐도 안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졸지에 여자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여자에게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자에게 들을 말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 풍경은 타인을 관찰하면서 사는 직업을 가진 관객이 두 명이나 동원된 굉장한 볼거리임에는 분명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두 사람에게 불충분했던 것은 시간 같아 보였다. 이전의 여자와도, 지금의 여자와도 이별하는 모습으로 봐서는 두 사람은 결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사이가 아니었다.

“프리랜서 가이드는 아니겠지?”

내가 프리랜서 형사처럼 중얼거리자 친구는 그렇게 보기에는 남자가 적극적이거나 민첩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나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무엇보다 분명한 건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 한 가득, 이 푸른 가을 하늘이나 코스모스가 가득 핀 들판을 머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충분히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

그 사내 옆으로 가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도 싶었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 받기 싫어 그 상황을 그냥 넘기고 만다. 뭔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다가가 본들 그 이야기의 구석구석과 사정을 온전히 채굴할 확률도 높지 않다.

뭔가 미진한 채로 서서 소극적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이렇게 서 있지만 말고 조금이라도 인생의 방향을 바꿔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다른 삶이 펼쳐지지 않겠습니까?’하면서 길거리에서 만나는 도인들 말투로 말을 건네보고도 싶었지만 우리는 말이다, 요컨대 우리 모두에게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는 법이다.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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