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증권 베테랑 16명, 계약직 고문으로 재영입
수십년 쌓아 온 경험ㆍ인맥 내세워 지난해 개점 이후 흑자 행진

고액연봉의 화려함, 그러나 그 뒤엔 퇴직 후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다. 금융사 직원, 특히 은퇴 시점이 유독 빠른 증권사 직원들 얘기다. 동네 치킨집 사장 중 전직 금융맨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평생 쌓은 전문지식이 사장되는 건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 이들의 경험을 ‘재활용’하는 대신증권의 역발상 시도가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증권업계에 화제다. 불가피한 구조조정과 회사 수익증대를 조화시킨 윈-윈 사례로 주목 받고 있다.
올 초 희망퇴직 후 지난 6월부터 대신증권 마이스터클럽 잠실점에 출근하고 있는 박상우(50)씨는 이 지점의 막내다. 이 곳에서 일하는 19명 직원의 평균 연령은 무려 56세. 모두 대신증권의 전직 임원부터 정년ㆍ희망 퇴직자들로만 구성돼 있는 전국 최초의 퇴직자 지점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한 물 간 퇴물들의 모임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증권사마다 전국 거의 모든 지점이 적자에 허덕이는 요즘, 대신증권 마이스터클럽 잠실점은 이례적인 흑자 행진을 벌이는 전국 톱 클래스 지점이다. 지난해 11월 개점 직후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해 1년도 채 되기 전에 벌써 운용자산이 약 1,500억원에 이르렀다. 24일 영업점에서 만난 박찬일(54) 영업소장은 “보통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일반 영업소가 평균 2,000억원 정도의 운용자산을 갖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지긋한 나이만큼 직원 하나 하나가 모두 증권 바닥의 베테랑. 일상적인 영업전략 회의를 해도 오가는 대화의 수준이 웬만한 증권사 본점의 임원 회의를 뛰어 넘는다. 한 직원은 “노련한 사람들만 모여 있다 보니 각자의 정보들이 한 데 모여 큰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한다”고 전했다. 각자가 가진 자신만의 영업ㆍ판세분석 노하우를 회의 때마다 공유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애널리스트를 불러 정보 업데이트도 하며 그에 대한 생각을 논하기도 한다.
역발상 지점의 출발은 지난해 봄이었다. 전직 사원 모임인 대신증권 동우회에서 작년 5월에 나재철 사장에게 “퇴직자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 시발점. 회사측도 고참들의 경쟁력에 주목해 작년 11월 잠실에 전용 점포를 열었다. 19명 가운데 16명이 대신증권 퇴직자 출신으로 이들은 고문 직함을 달고 6개월 단위로 계약하는 계약직이다. 다른 증권사에서도 정년퇴직한 이들 가운데 일부를 지점에 재취업시키기는 하지만 퇴직자들만 한 데 모아 점포를 개설한 건 대신증권이 처음이다.
뛰어난 실적의 비결은 바로 경험이다. 수십년간 쌓아온 네트워크와 노하우가 젊은 직원보다 월등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매달 회사가 정해준 일정 수익률을 넘기면 그에 따라 40~50%의 인센티브를 지급 받는데, “지속적으로 관리해 온 고객층과 나름의 영업 노하우가 있어 이를 넘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귀띔했다.
직원들은 잠실점이 일석 삼조의 효과를 내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회사는 능력 있는 직원들에게 기회를 줌과 동시에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퇴직 직원들은 갑작스런 실직 대신 일하면서 노후도 준비할 수 있어 좋다는 것. 여기에 고객들까지 “오랫동안 의지해 온 자산관리 파트너와 계속 함께할 수 있어 좋다”며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다.
직원 개개인의 만족도도 높다. 증권업계 침체로 구조조정 압박이 심해지던 차에 마침 잠실점 소식을 전해 듣고 희망퇴직을 결심했던 박상우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다. 그는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퇴직을 했는데도 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서 내 취미생활을 즐길 여유까지 있다”고 했다. 임원으로 재직하다 퇴직 후 이 지점에 새 둥지를 튼 김모(54)씨도 “퇴직까지가 인생의 첫째 매듭이라면 지금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안정적인 완충지대인 셈”이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김진주기자 pearlkim7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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