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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나의 스승

입력
2014.09.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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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스승께 배웠다. 그 한분 한분께 감사한 마음을 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사는 것으로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

내가 입학한 대학에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인 선생님들이 계셨다. 평소에 존경했던 많은 선생님들께 직접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매일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행복했던 건, 그렇게 좋은 선생님들께 배운 것들을 잘 익히고 싶어서였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때의 열정이 되살아난다. 선생님들께 ‘잘한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백대웅 선생님은 내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할 당시 전통예술원의 원장님이셨다. 키가 크시고, 눈은 호랑이처럼 빛났다. 음악을 대하는 마음이 정말 순수하셨고,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분이었다. 커다란 목소리로 강의하시다가 급작스럽게 날카로운 질문을 하시고는 했다. 우물쭈물 거리거나 부실한 대답을 하면 가차없이 불호령과 꿀밤이 떨어졌다. 모든 촉각이 학생들을 향했던 선생님 앞에서는 괜히 주눅들고 무서웠다.

그날은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아주 화창한 봄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선생님들은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가시던 중이었는데 그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대웅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이다. 이리오라고 손짓하셔서 약간은 두려운 마음을 품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미적거리다가 혼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밥은 먹었어?” 하신다.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무슨 심부름이라도 시키시려나 보다’ 했지, 학생이 밥을 먹었는지 궁금해 부르실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 못 먹었다는 나의 대답에 갑자기 지갑에서 식권을 한 장 꺼내시더니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교수용 파란색 식권. 나는 왠지 감사하단 말을 하는 것도 잠시 잊고 손에 든 식권을 내려다 보았다. 마음이 찌르르했다. 선생님께 달려오면서 생각했던 막연한 두려움들이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아직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밥 먹고 다녀라.” 눈부신 기억이다.

내가 작곡가인 백대웅 선생님의 곡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은 국악관현악을 위한 ‘남도아리랑’이다. 사실 이 곡은 수도 없이 많이 연주한 곡이라 좋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가장 좋아하는 곡이 된 건 선생님의 퇴임기념 공연 때였다. 그날 공연의 마지막 곡이 남도아리랑이었다.

곡의 시작은 사뭇 비장하다. 그러다 다정하고 서정적인 선율이 흐른다. 느리고 차분하게 이어지던 선율은 조금씩 리듬을 만들어간다. 그러다가 진도 아리랑 가락이 이어지면서 진한 맛을 낸다. 그리고 점점 흥겨워진다. 산을 그리듯 음악은 흘러간다. 오밀조밀 하다가 능청거리고, 긴장감을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각 악기들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쌓아 간다. 국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즐겁게 들을 수 있는 곡이다. 퇴임기념 공연이라 많은 선생님의 제자들이 공연에 참여했고, 연습시간도 즐거웠다. 그리고 본 공연은 말도 못하게 멋졌다! 대규모의 관현악단이 오랫동안 많이 연주해왔던 존경하는 선생님의 곡을 그 분의 퇴임기념 공연에서 연주하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연주자들 마음에 정말 잘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음악은 저절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때 나의 기분은 마치 한 알갱이의 흙이 된 것 같았다. 지휘자가 도예가가 되어 물레를 돌리며 흙을 빚고 있고, 우리는 그 흙 알갱이로 도자기가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껏 관현악 합주를 하면서 처음 느껴 보는 엄청난 일체감이었다. 내가 그 큰 덩어리의 한 조각인 것이 진심으로 행복했다. 신기한 것은 그날 공연이 끝나고 다들 그 얘길 했다. 연주한 사람들 모두가 환상적인 경험을 한 것이다. 관객들도 지금껏 들어 본 남도아리랑 중에 최고라고 했다.

선생님이 고인이 되시고, 1주기 추모공연 때 우리는 또 남도아리랑을 연주했다. 쏟아지는 눈물에 악보가 자꾸 흐려졌다. 선생님은 정체되는 것을 싫어하셨다. 전통음악이 뜨겁게 살아 있기를 바라셨다. 나의 음악이 여전히 뜨거운가를 생각하며 또 선생님이 그립다.

꽃별 해금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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