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헤어짐을 전제하는 이별만이
님과 나를 가장 깊은 인연으로 만들고
님의 아름다움을 보존한다
거문고 곡조와 함께 출렁이던 님
아득한 눈을 감으며 멀어져 가고
사모와 존경이 그 거리를 가득 메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시의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신기한 시집이다. 한용운은 근대시에 관해서 특별히 또는 오랫동안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집은 개항 이후 한 세기의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뜻이 깊은 시집에 속한다. 만해가 ‘님의 침묵’을 쓸 때, 그에게는 분명히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이 있었으며, 높은 지혜의 체득을 향한 한 선사의 희구가 있었다. 시집에서 줄곧 님을 그리워하는 한 여자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던 그에게는 또한 한 연인의 열정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님의 침묵’의 ‘작가적 의도’에 관해 말하려 한다면 이 염원과 이 희구와 이 열정의 어느 한 쪽도 젖혀 놓을 수 없다. 시인이 애국시를 쓰려 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연인이었으며, 오도시를 쓰는 선사로서도 민족의 암담한 현실에서 비껴서 있지 않았으며, 연애시의 어조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는 정신의 자유자재한 경지를 구하는 수도자로 남아 있었다. 그는 민족의 지사로서도, 불도의 선사로서도, 그리고 한 사람의 애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 성의를 다하였기에, 그가 시를 쓰며 무엇을 의도했건, 그 마음속에서는 이 힘들이 서로 엇물려 ‘님의 침묵’을 그 의도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만해의 시들은 이렇듯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그 성의의 힘으로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님’의 모습으로 형상하려 하고, 그 존재 앞에서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를 성찰하고, 그 존재를 인간의 육체로 감지하는 희귀한 경험 하나를 한국 문학에 끌어들였다. ‘님의 침묵’의 시편들은 우리의 몸으로 체험한 한 ‘절대의 드라마’를 현대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최초의 한국어 텍스트에 해당한다.
만해에게서 그 절대의 드라마를 표현하는 말은 흔히 선시에서 보는 것과 같은 황홀경의 묘사나 초월적 경지에 대한 암시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침묵하는 대신에 내뱉는 방편적인 언사가 아니며,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기에 사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는 척하는 핑계의 말이 아니다. 만해의 ‘님’은 인격적이고 구체적이다. 님은 시 ‘예술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얼굴에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돌며, 시인에게 노래를 가르쳐 준 적이 있으며, 그 집에는 “침대와 꽃밭”이 있고 그 꽃밭에는 “작은 돌”이 있다. 시인이 “그대로 쓰고” 싶어 하나 늘 실패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다. 그렇다고 만해가 서구의 오랜 형이상학적 전통이나 근대의 순수시가 내세우는 끝없는 부정의 방법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자라면, ‘이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함으로써만 전달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것의 이름 위에, 만해는 “수직의 파문을 내며 떨어지는 오동잎”과 “무서운 구름이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알 수 없어요’)과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차례차례 쌓아올린다. 형이상학자들이 절대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어떤 한 존재’는 세상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겉껍데기들을 하나씩 벗어버리면서 나타나지만(실은 그 껍데기들 속으로 사라지지만), 만해의 님에서는 그 결함 있는 흔적과 파편들이 서로서로 그 결함을 보충함으로써 그 거대한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작은 요소들의 부단한 협력 관계가 임의 절대적인 속성을 상대적인 너울들로 가리기도 한다.
그러나 만해에게서도 님은 마음만 먹으면 다시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애인이 아니었다. 시집에서 내내 시인은 님을 한 번도 온전하게 누리지 못하며, 그 얼굴과 목소리마저 제대로 감지할 수 없다. 그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님의 침묵’)고 말기 때문이다. 시인은 님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려 하면서도 님의 길을 따라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발걸음을 만류하려고까지 하지만 헛될 뿐이다(‘가지 마셔요’). 님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겼더라도, 님이 인간의 시간에 어떤 모습으로 한 번 나타나더라도, 절대적인 존재인 님의 정처는 인간을 넘어선 곳에 있다. 님의 나라는 다른 세계,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에 있다.
님의 나라와 님의 존재를 인간의 육체로서는 느낄 수 없고, 인간의 지성으로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만해는 님과 ‘나’ 사이에 오직 그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관계 하나를 만들었다. 저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와 부족한 인간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만해에게서는 사람의 일일 뿐인 ‘이별’로 바뀐다. 이별도 님과 나를 떼어 놓고, 님과 나의 만남을 가로막지만, 이별은 원칙적으로 그리운 것과 그리워하는 정신 사이에 하나의 기억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만남이 있었고 헤어짐이 있었다는 기억. 만해는 시 ‘님의 침묵’에서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라갔”으며,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다고 쓴다.
님과 나 사이에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가 실재했는가는 따질 필요가 없다. 이별이라는 생각은 님에게 육체를 주고, 님과 나의 관계를 만들어, 현실의 “차디찬 티끌”을 저 찬란한 빛의 흔적으로 끌어 올리게 될 하나의 기억을 거기서 끌어낸다. 시인에게서 이전과 이후의 삶을 칼날처럼 분명하게 가른다는 점에서 “날카로운” 첫 키스에 대한 기억도 이별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되는 순간에 대한 운명적인 기억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별은 비록 만난 적이 없는 님이라고 하더라도 그 님과 나 사이에 인연을 상기시킨다. 정신은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있어야 할 일도 기억한다. 억제할 수 없는 욕망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망을 실제의 기억이라고 여기는 경우에서도 불 수 있듯이 기억은 아직 없었던 시간의 기억, 곧 까마득한 태고의 기억이 되고 미래의 기억이 된다. 그래서 님의 거대한 넓이가 이별을 말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올 수 있다.
시 ‘사랑의 측량’은 이 이별의 개념에 대한 논리적 성찰이다.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 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양을 알려면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사랑의 측량’ 전문
이 역설의 시는 님과 나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리움이 그만큼 커진다는 뜻으로만 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님과 나의 거리는 나의 비천함과 님의 고결함 사이를 벌리는 격차이기도 하다. 이별은 범접할 수 없는 님과 그리워하는 나를 가장 깊은 인연으로 맺어놓는 동시에 순결한 님과 초라한 나를 갈라놓는다. 님을 향한 나의 사모와 존경이 이 거리를 메우며 펼쳐지기에 님의 비범함이 또한 이 거리에 의해 규정된다. 님의 순결하고 무한한 넓이가 또한 님과 나의 이별에 의해 인식되고 확장되고 보존된다. 님은, 적어도 인간인 나의 마음속에서는, 이별이라는 인연의 장치에 의해서 그 확고한 존재를 얻는다. 그 특별한 존재와 그 속성이 한 인간의 슬픔과 울음에 의해 측량된다는 것은 신비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 ‘이별은 미의 창조’는 이 신비에 대한 미학적 고찰이다.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美는 아침의 바탕(質)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전문
이 시도 만해의 여러 시들처럼 논리적이면서 신비롭다. 시의 말을 일반 산문처럼 풀어 놓으면 그 논리의 선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별하는 일은 미를 창조하는 일이다. 실질이 없으면서도 황금처럼 보이는 아침 햇살도, 올이 없으면서도 검은 비단처럼 보이는 밤의 어둠도, 생명의 영원한 순환인 자연도, 무한히 이어질 하늘의 푸른빛도, 그것들 자체로서는 중립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미추의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다. 빛과 어둠의 광막함도, 자연 조화의 숭고함과 천지의 무한함도 인간 의식의 산물인바, 이별과 같은 결여의 상태에서 그 성스러움과 위대함에의 감정은 더욱 절실해진다. 이와 같이 “이별은 미를 창조”한다. 이에 대한 결론으로 만해는 첫 번째 시구를 조금 바꾸어서 마지막 시구를 쓴다.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 시구는 필경 ‘미는 이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로 읽어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대한 동경이 이별을 이별되게 하고 결여를 결여로 느끼게 한다고, 내가 나의 이별에 바치는 슬픔에는 저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이상이 깃들어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님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남겨 두는 것은 미욱한 나와의 이별밖에 없다고.
만해에게서 아름다움의 반은 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비범함으로, 나머지 반은 이별과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침묵을 희망의 한 형식으로 체험하려 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알 수 없는 어떤 조화에 의해 이별이 그저 이별이기를 그치고 어떤 운동의 기억과 소망이 되지 않는다면, ‘님의 침묵’의 마지막 시구가 말하듯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가 비록 부질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돌지 않는다면, 한 시대의 정황은 오직 이별일 뿐 ‘님과 나의 이별’이 아닐 것이다.
논증가로서의 만해가 한 정황의 가장 나쁜 조건들을 주시하고 이별의 가장 비극적인 실상을 들추어 낼 때, 시인 만해는 떠나보낸 님의 기억을 제 육체 속에서 끌어내어 하나의 소망으로 미래에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해가 어디서 만나야 할지 모르는 님의 얼굴을 우리 눈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그려 보여 주는 것은 그가 자신의 심술궂은 논리를 잠시 잊어버렸을 때이다. 다음은 ‘거문고를 탈 때’의 전문이다.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러니 처음 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 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가늘다가 높을 때에 당신은 거문고 줄에서 그네를 뜁니다
마지막 소리가 바람을 따라서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당신은 나를 힘없이 보면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님의 일로 근심하는 사람이 그 근심을 잊기 위해 일으키는 곡조에 님의 형상이 담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님은 그 곡조와 함께 출렁이고, 그 곡조와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거문고 소리가 사라질 때 “아득한 눈을 감”는 것은 님이라기보다는 시인 자신이 아닐까. 그는 높고 낮은 거문고의 소리 따라 상념했던 님을 이제 눈을 감고 다시 떠올려보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아득한 눈”이란 어떤 눈일까. ‘아득하다’는 ‘아련하게 멀다’는 말이며, ‘까마득하게 오래되다’는 말이다. 아니 어떤 이유로 혼미해진 정신은 모든 사물을 시간과 공간 저 너머에 있는 사물처럼 멀고 까마득하게만 느낀다. “아득한 눈”은 아득하게 멀어지는 눈이면서 동시에 그 아득한 눈을 아득하게 바라보는 눈이다. 그것은 님의 눈이며 나의 눈이다. 서로 아득하게 멀어지는 눈이며 서로 아득하게 바라보는 눈이다. 님도 나도 그 눈을 감는다. 그 감기는 눈 뒤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감각의 미묘함이 있다. 아득하게 눈을 감는 자의 감각은 깊다. 이별이 창조하는 미는 이 감각의 깊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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