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해 전,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스타로 통하던 학자가 대학에 안착했다. 10년 이상 재야를 떠돌며 묵직한 저작과 빼어난 강의로 이름을 알려온 학자다. 그를 전임으로 초빙한 대학도 인문교육 혁신 계획을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받은 학교였다. 대학은 이 학자에게 강화된 인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학자는 연구와 집필을 미룬 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보기에 따라 환상적인 대학과 학자의 만남, 그러나 그 학자는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이 시행된 지 두 해도 지나지 않아서다. 반발은 학생에게서 시작됐다. 취업 준비에도 바쁜데 한가하게 웬 인문학이냐는 것이었다. 수준 미달인 리포트와 시험 답안에 좋지 못한 학점이 나가자 반발은 거세졌다. 편승한 교수들은 한술 더 떴다. 교수회의 석상에서 특정 사상가에 대한 강의를 예로 들며 이게 왜 필요하냐고 맹공했다. 이 사상가는 역사와 철학은 물론, 문학, 사진, 영화, 건축, 디지털 등 문화예술 전 분야에서 최근 가장 각광받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문제는 그 회의 참석자 중 벤야민이 누군지 아는 교수가 한 사람도 없더라는 것이다.

이에 앞서 수도권의 한 대학에 자리를 잡은 또 다른 스타급 학자의 사정도 나을 것이 없다. 조금만 본격적인 강의를 하면 수강생이 없고, 수준을 낮춘 강의에는 집중하는 학생이 없다는 것이다. 강의 시간 내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벽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피로를 느낀다. 시간 강사로 나가는 다른 대학의 박사과정 강의에서 보람을 찾지만, 이 강의 또한 언제까지 유지될 지 알 수 없다. 박사 과정생이 자꾸 줄어들고 있는 탓이다. 실제로 한 유명 대학 철학과 재학생의 상당수는 로스쿨 준비생이다. 이 학과 출신이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하는 사례도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안녕하지 못한 건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도 비슷하다. 책을 만들기 위해 얼마 전 주요 인문학 공동체를 직접 조사했다는 한 출판사 편집자에 따르면 인문학 공동체의 대다수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존폐 기로에 서 있는 공동체도 적잖았다. 15년 이상이나 존속돼,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문학 공동체도 그 중 하나다. 이 공동체가 올 가을 만들어 공지한 20여 개의 강좌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어렵게 개강한 강좌도 수강생이 평균 다섯 명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강의하는 학자에겐 교통비조차 주기 어렵고, 공동체는 월세 감당하기에도 허리가 휜다.

물론 열풍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잘 되는 인문학 강좌도 없지 않다. 정부와 지자체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는 이른바 선거용 인문학 강좌다. 이곳을 찾는 이는 노인과 주부를 주축으로 하는 공짜 수강생. 진행되는 강좌도 당의정을 듬뿍 바른 유사 인문학, 또는 무늬만 인문학 강좌다. 주로 강연 형식의 단발성 특강이나 유명 학자들을 모아 입문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릴레이 강의를 하는 이곳에서 인문학의 핵심인 깊은 사유나 성찰이 가능할 리 없다. 중요한 건 예산 따내기일 뿐, 내용이 아니다. 인문학 열풍 속에 극소수 베스트셀러를 제외한 인문학 책 판매가 격감해온 것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인문학은 여유 있는 자에게나 가능한 즐거운 학문이지만 수행을 연상케 하는 고통스러운 공부이기도 하다. 인간과 세계, 우주 만물의 근원을 돌아보고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근원을 돌아보며 이상을 추구하는 공부에서 날 선 현실 비판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비판을 싫어하는 세력이 할 수 있는 인문학 진흥은 어떤 것일까.

초·중등 인문정신 함양, 인문정신 기반 대학 교양 교육 개선, 인문 분야 학문 육성. 지난 8월, 대통령 주재로 열린 문화융성위원회 회의에서 교육부와 문화부가 보고했다는 인문정신문화 진흥 과제 중 일부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를 보고한 공무원이나 대통령은 인문학 열풍 속에 말라 죽어가는 인문학 교육, 인문 분야 학문의 실상을 알고 있기나 할까.

“…내 이럴 줄 알았다.” 인문학 열풍이니 진흥이니 하는 말이 들릴 때마다 떠오르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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