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하다 소문난 앞집 간전댁...아내와 있을 땐 부드러운 할머니
"선재 아빠, 혼자 그 일 다 못 혀"... 맘 불편하다고 완곡히 거절해도
"안 데리구 오면 혼자 걸어오지"
내가 할머니 나이 때 누군가에게 가르침이 되는 간전댁이 되어 있었으면...
내가 안 되면 아내라도...
8월의 산타처럼 교황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후, 뭔가 나아질 것 같던 세상은 곧바로 예전의 관성을 되찾았다. 뉴스에는 맨날, 새빨갛거나 시퍼런 배경에 앉아 빤지르르 머릿기름 바르고 표정만 심각한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꼭 나온다. 반면에 햇볕에 바랜 누런 배경 앞의 사람들은 여전히 초췌하고 슬프다.
‘단식’은 몰라도 ‘폭식’이 정치 뉴스로 나오는 세상은 예상 못했다. 추석 때 생각 없이 먹어댄 게 죄스럽기만 하다. 어떤 외국인이 자기네 나라는 심심한 천국이고 코리아는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했다는데, 이걸 확! “우리나라를 지옥이라고 한 것도 그렇지만, 넌 여기 돌아가는 꼴이 재밌냐? 불구경이 재미있는 건 짜샤 지는 강 건너에 있으니까 그런 거야 임마. 알아들어? 확 군대에 입대 시켜버릴까 부다.” 흥분하면 안 된다. 식도염 도진다. 화 내면 나만 손해다. 콩밭 풀이나 매야겠다.
바래기. 이름이 참 예뻤다. 만약 우리가 딸을 낳았고 그 전에 이 이름을 들었다면 애 이름을 바래기라고 지었을 지도 모른다. 큰 일 날 뻔했다. 이 땅 300만 농민의 '철천지 웬수'인 국가대표 잡초의 이름이었다. 콩밭을 위 아래로 점령한 이 놈들을 뽑기 위해서는 두 손 두 무릎으로 기어들어 가야 했다. 이미 지표면은 바래기의 세상이다. 놈들은 줄기를 뻗어가며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는 생존방식을 자랑한다. 대강 잡아 뽑으면 꼬리 자르듯 툭 끊어져주고 뻔뻔하게 잘 살아가는 모양이 아까 그 기름 바른 사람들을 닮았다. 생각 없는 콩대는 이놈들과 밤새 블루스를 추다가 자빠진 듯 얽히고 설켜 바닥에 같이 드러누웠다. 조심스레 더듬으며 큰 뿌리를 찾아야 한다. 머리끄덩이 잡듯 손가락으로 몇 뿌리 감아 일어서며 쭉 잡아당겼다. 어렸을 적 ‘전설의 고향’에서 봤던 미친 여자 산발한 모습으로 질질 끌려 나온다. 길게 늘어진 풀을 둘둘 말아 망나니 머리처럼 뭉친 덩어리를 매실나무 아래로 내던졌다. 통쾌하다.
다시 바닥으로 기어들어가려다 보니 모기가 한 여름 가로등 아래 하루살이들처럼 버글거린다. 눈 감고 박수 쳐도 서너 마리는 잡히겠다. 내가 무딘 편인가. 그제서야 온 몸이 근지러운 이유를 알았다. 옛말 틀린 거 없다던데 이번엔 확실히 틀렸다. 모기 입이 돌아간다던 처서가 지난 지 한 달이 됐는데 얘들은 어떻게 아직 회식 준비를 하고 있냔 말이다. 아니면, 입은 삐뚤어져도 피는 똑바로 빨라고 교육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도 옆에 계신 할머니는 허리를 허옇게 드러내고 상체를 파묻은 채 아랑곳 않고 풀을 뽑으셨다. “할머니, 아유 이런, 모기 다 물려요.” 옆에 가서 윗도리 잡아당겨 드리자 “냅둬요. 모구(모기)는 농사 안 지니께 이렇게라도 먹구 살아야지 뭐.”
간전할머니. 앞집 사시는 아내의 절친이다. 얼마 전 “선재 아빠, 혼자 그 일 다 못혀요” 하시며 농장 일을 도와주러 오신다고 하기에 “할머니 그러시면 제가 맘이 불편해서 안 되요. 동네 분들한테 저만 욕먹어요. 오지 마세요” 했더니 다음날 2km 거리를 새벽에 걸어오셔서 토란 밭을 정리하고 계셨다. “할머니! 이제 농장 출입금지예요!” 큰 소리를 냈지만 오히려 할머니는 “안 데리구 오면 또 걸어오믄 되지 뭐” 하시며 협박성 미소를 지으셨다. 이후에도 여러 번 할머니와 비슷한 건으로 맞서봤지만 번번이 패했다. 몇몇 분들과 어찌하면 좋을까 의논도 해 봤지만 “어쩔 것이여”가 중론이고 “그냥 잘 해드리는 수 밖에”가 대안이었다.
택호가 ‘간전댁’이라 보통 마을 분들은 ‘간전떡(댁)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아내가 ‘할머니’로 부르고 싶다고 해서 우리만 그렇게 부른다. 그렇잖아도 이사 온 초기에 동갑내기 이장이 “자네는 왜 간전떡 엄니를 할머니라고 부른댜?” 물어왔다. 농장에 놀러 와서 담배 꽁초 아무데나 버리는 것 빼고는 좋은 친구다. 난 알기 쉽게 설명해줬다. “이 봐, 선재 엄마가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면 둘이 관계가 어찌 되겄나. 가뜩이나 웃집 할매가 아내보고 두 번이나 ‘이 집 딸래미여?’ 물으셨다는데.” “그거야 자네랑 제수씨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잉게 그런 거지. 몇 살 차인디?” “까마득한 두 살.” 이 친구 머뭇머뭇 하더니 “자네가 잘못했네” 하며 돌아선다. “내가 뭘!”
어쨌든 간전할머니는 우리에게 앞집 할머니 그 이상이다. 내려온 첫 해 마당 텃밭에 감자를 심는데 할머니들이 도와주겠다고 오셨다. 농사라고는 책으로 배운 것 뿐이라 잘됐다 싶었는데 그 중 간전할머니는 오히려 나한테 물으셨다. “감자를 엎어 심으까요 뒤집어 심으까요.” “감자 새를 이 정도 띄우면 되겄소?” “두둑 옆으로 심고 북을 줄라요 아니면 가운데 그냥 높이 심을라요.” 오히려 나한테 방법을 물으시니 무안스러웠다. “할머니, 왜 저한테 가르쳐주시지 않고 물어보세요?” 여쭤보니 "생각해 놓은 게 있으실 텐데 워쩌케 내 맘대로 심는다요” 하셨다. 70년 경력의 베테랑이 초짜 신병의 뜻을 물으시는 거다. “지극한 예(禮)는 물어서 하는 것”이라고 했던 공자의 말씀이 실제로 발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 농막에서 물 한 모금 잡숫고 하시게요” 잠깐 쉬었다 하자고 말씀 드렸더니 “집에서 마시고 나왔는디 뭘 또 먹자 그요.” 집에서 나온 지 서너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러신다. 억지로 끌려 오시던 할머니가 감나무 아래서 채 덜 익고 떨어진 대봉 감을 주우셨다. “이런 것두 장에 내가면 다 팔렸는디” 하신다. 다른 해보다 많이 떨어져 버린 감을 아까워하시는 것 같아 죽을 맞춘답시고 “시장에 한 번 가져가 볼까요?” 했더니 “그 때 사먹던 사람들은 벌써 다 세상 떴지. 이젠 이게 팔리간디요?” 자꾸 무안스러워진다.
선풍기 틀고 물 따라 드리면서 모기 욕을 늘어놨더니 할머니도 뭐라고 욕을 하시는 것 같은데 잘 못 알아 들었다. “예? 뭐라고 그러신 거예요?” 천천히 말씀하셨다. “모구 댕긴다고 해싸도 우리가 없으면 느그 새끼들은 벌 볶아서 주왕에 찌끄러논거 맹키로 벌벌 떨거이여 그런다고요!” 다시 설명을 하시는데, 예전부터 내려오는 모기 입장에서 하는 얘기라신다. “인간들아, 모기 많이 돌아다닌다고 욕하지 마라. 그나마 우리가 안 보일 때가 되면 너희 자식 새끼들은 뜨거운 불에 볶은 벌이 오그라든 것처럼 추워서 부엌에 쪼그려 앉아 벌벌 떨거여” 이 뜻이란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너무 떠들지 마라 이런 얘긴가 보다.
이렇듯 할머니가 툭 던지듯 하시는 말씀들은 주옥이 많다. 대개는 전해 내려오는 것이겠지만 적절한 타이밍은 할머니 몫이다. “가실(가을) 일 할 때는 오줌 누고 골마리(허리춤)도 못 추켜 올린답디다. 선재 즈그 어매는 애들 가르친다고 바쁘고, 선재 아빠 혼자 하느니 손이라도 보탤라구 하는 것잉게 부담 갖덜 말어요. 난 암시랑토 않응게. 아 보리방아 찧을 때 옆에서 머리만 까딱거려도 도움된다고 안헙디여”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작정을 하신 게다.
말씀만이 아니다. 작년 일이다. “유헌씨 이거 좀 봐” 점심 먹으러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내가 신이 나서 큰 베 보자기 같을 걸 들고 흔든다. “내가 차 덖을 때 멍석대신 깔고 차를 비빌려구 할머니한테 이불집에 가면 광목천을 살 수 있냐고 여쭤봤어. 그랬더니 돌아가신 할아버지 무명 두루마기를 다 뜯어서 밤새 만드셨대. 어쩌면 좋아” 울먹이며 하는 설명을 듣고 보니 누르스름하게 빛이 바래 세월이 느껴지는 천이 조각보처럼 정성스레 꿰매져 있었다. 마침 할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오신다. “죽은 영감 거여. 내가 젊어서 만들아 준 거이라. 꼬실라뿌까 하면서 몇 년을 들었다 놨다 했는디 선재 어매가 쓸모가 있어서 쓰믄야 내가 좋지”하시며 수줍게 웃으셨다.
그 해 가을, 키질이 서투른 아내는 가을에 타작한 콩에 섞인 콩깍지며 작은 줄기들을 종일 손으로 골라내다 절반도 못하고 툇마루에 놔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선재 학교 가는데 보니 말끔한 콩알들이 바구니에 담겨 마루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깨기도 전 새벽에 할머니가 키질을 해놓고 가신 거다. 아내에게 “할머니한테 해 달라고 했어?” 타박조로 물으니 절대로 아니란다. “혹시라도 그러실까 봐 키질 흉내도 안 냈다구!”.
일부러 쉬쉬해도 소용없었다. 메주 쑤는 날 아침이면 숯 가득한 화덕 솥에는 이미 콩이 푹 삶아져 있고, 김장하는 날이면 배추는 절여져 물이 빠져 있고, 장 담그는 날이면 사람만한 항아리가 씻겨 엎어져 있었다. 우렁각시가 따로 없다.
꺾인 운동화 질질 끌고 혀 짧은 소리로 “함무니~” 부르며 뽀르르 달려가는 아내, 머리에 흰 서리가 덮인 지 아내 나이만큼 되는 간전할머니는 서른 다섯 살 차이를 극복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절친이 됐다. 20년 전, 남편을 먼저 하늘로 보내시고 장년의 자제는 모두 객지에 있고 혼자 사신다. “긍게 영감 보낸 그날이 딱 7월 9일이여” 하시며 시작되는 할머니의 레퍼토리. 아마 아내는 수십 번은 들었을 거다. 그래도 할머니 옆에 누워 매번 처음 듣는 양 대꾸 해드리며 귀를 세운다. 마을에서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분인데, 신기하게도 아내와 있을 때는 한없이 부드러워지신다. 뵙는 것만으로도 죄송스러울 때가 많은데 오히려 “선재네가 옆으로 와 줘서 내가 고마워” 하실 때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저녁 먹고 뒹굴고 있는데 선재가 방으로 왔다. “아빠, 성공하려면 꼭 공부 잘해야 돼?” 기습적인 질문인데다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아니 꼭 뭐...”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아빠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다며. 그래야 회사도 다니고 이 정도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이 녀석의 의도가 뭘까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왜?” “서울 애들은 나 보다 공부도 훨씬 많이 하고, 점점 차이도 날 거고, 나 학원 다닐까?” 지난 겨울방학에 도서 벽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캠프에 다녀 온 뒤 불안한 마음이 생겼나 보다.
“선재야, 봐라. 도시 애들 놀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공부하고 과외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갔다 치자. 또 밤낮으로 취직시험 준비해서 회사에 들어갔다 치자. 또 밤낮으로 일하고 술 잘 먹고 눈치 잘 봐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치자. 그래서 머리에 기름 바르고 악수 많이 하고 다닌다고 치자. 그러면 성공한 건가? 그 사람들이 결국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꿈뻑거리는 선재 눈을 보며 말했다. “시골 내려와 사는 거야.” “오! 그럼 아빠도 성공한 거네!” 속으로 ‘그 사람들은 내려와도 일은 안하지’ 했지만 마무리는 해야 했다. “아빠 생각에 성공이란 건 따로 없어 선재야. 그냥 계속 꿈을 꾸고 이루고, 또 꾸고 이루고, 그게 중요하지.” 선재가 다시 묻는다. “아빠는 이제 꿈이 뭔데?” “아빠 꿈?” 선재 눈을 바라봤다. 그 눈으로 내 얘기가 쏙 빨려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빌었다. “간전할머니 나이 때 간전할머니처럼 되는 거. 모두에게는 아니라도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고 가르침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알아 들었을까. 더 이상 질문을 않는다.
할머니 모습을 한 누군가의 천사.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내가 안 되면 아내라도......
前 한국일보기자 cameragaga@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