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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미의 배후

입력
2014.09.1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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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에 어긋한 법원의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판결과 세월호 참사 유족의 참척 고통을 조롱하는 일베 회원의 패륜 행위는 배후가 한곳으로 수렴한다. 자신이 곧 규범인 지도자다.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상식에 어긋한 법원의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판결과 세월호 참사 유족의 참척 고통을 조롱하는 일베 회원의 패륜 행위는 배후가 한곳으로 수렴한다. 자신이 곧 규범인 지도자다.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왜 패륜이 기승인가. 인민의 정의관념이 흔들려서다. 법은 규범 구실을 못한다. 국가가 몰상식한 정권의 부역자로 전락한 결과다. 도덕이 비운 자리를 채우는 건 지도자의 비정이다.

“당연한 것을 행하는 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때로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관전해왔다. (…) 그러니까 내가 국정원 사건의 본질과 실체를 뼈저리게 느낀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 댓글 사건이 경찰, 검찰, 법원을 거치며 우리 법치주의에 가한 상처를 지켜 보면서다. 상처라는 말도 부족하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지나간 자리마다 폐허였으니. 지난해 9월 채동욱 검찰총장이 내쫓기고, 윤석열 국정원 대선개입 특별수사팀장이 직을 걸고 혐의를 추가한 뒤 징계 당하고, 기소 사건의 잇단 무죄 과정을 법조기자로서 지켜보며 국정원 사건이 나까지도 짓누르는 듯 마음이 아팠다. (…)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이범균)가 11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정치개입은 했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라고 공직선거법 위반 무죄를 선고한 것은 판례조차 무시한 것(본보 13일자 3면)으로 지적했으니, 더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김동진 부장판사가 이 판결을 “궤변”“법치주의는 죽었다”고 비판한 데, 누군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반응을 올린 것을 보고 우리사회가 어떤 갈증에 시달리는지 절감했다. 정의는 다수결(선거결과)을 업은 정권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상식과, 우리가 바라는 법의 모습에 근접해 있다고 말해주는 사법부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필요한가. 야당이나, 시민단체,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검찰이, 정부가, 그리고 판사가 옳은 것을 옳다고 확인해주기를, 즉 공식화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공공선의 붕괴는 그러니까 당연한 것이 너무나 힘든,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해주지 않는 ‘국가’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베 회원들의 패륜적인 언행이 노골화해도 대통령의 이해와 맞아 떨어진다면, ‘국가’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짚어주지 않는다.”

-당연한 것을 지켜 내기 힘든 시절(한국일보 ‘36.5°’ㆍ이진희 사회부 기자) ☞ 전문 보기

“지난해 한국을 다녀간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방한 대담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전제적인 지배자는 당연히 거부해야 하지만, 지도자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며,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바디우는 또 지도자와 대중이 ‘정신분석학적 전이 관계’에 있음을, 다시 말해 모범과 모방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좋은 지도자에게 찬사를 보낸다. 찬사는 모방 욕구로 이어진다. 지도자는 삶의 모델이 되고, 사람들은 지도자에게서 삶의 자세를 배운다. 그것이 ‘전이’다. (…) 지도자와 대중의 ‘전이 관계’가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반대 경우도 있다. 얼음덩어리 같은 지도자가 들어서게 되면 그 지도자의 지배력 아래 있는 사람들도 가슴속에 얼음을 품는다. 세상은 비정하고 무감각한 곳이 된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 본성’을 다룬 저작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느낄 줄 아는 공감능력이야말로 도덕성의 바탕이라고 선언했다. 흄은 우리의 공감능력을 현악기의 떨림에 비유했다. “현 하나의 떨림이 나머지 현들에 전달되듯이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옮아가며 결국 모든 사람에게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현과 현이 함께 떨려 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공감이다. (…) 그런데 지도자가 처음부터 공감능력이 없거나 스스로 공감능력을 말살했다면, 그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도 공감능력을 억누르고 차단한다. 현이 끊어지면 동정심도 끊어진다. 그런 환경에서는 멀쩡하던 사람도 감정 없는 사람이 되고 소시오패스도 차가운 본능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 약함도 비참도 모르는 지도자 밑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비웃고 즐기는 사람들이 번성한다. ‘일베’의 폭식투쟁 같은 반인륜 행위는 난데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 야만을 목격할 때마다 좋은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다.”

-공감능력과 좋은 지도자(한겨레 ‘아침 햇발’ㆍ고명섭 논설위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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