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지음
민음사 발행ㆍ284쪽ㆍ1만3,000원
이야기꾼 최민석 신작장편
액션 활극 주인공같은 캐릭터로 일제ㆍ유신ㆍ민주화운동까지
특유의 B급 유머로 재해석
1930년 8월 15일 서쪽 바다에 평화로이 떠 있는 섬에서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난다. ‘풍’이라는 이름의 그는 “짙은 눈썹, 검고 풍성한 머리숱, 바위처럼 갈라진 허벅지, 큼직한 코와 깊게 팬 인중, 붉고 빛나는 입술”을 가진, 슈퍼맨 같기도 하고 주윤발 같기도 하고 변강쇠 같기도 한 사내다.
액션 활극의 주인공에 걸맞은 외적 조건을 부여 받은 그는 과연 하늘의 뜻에 부응하여 으리번쩍한 개인사를 써 내려간다. 일제 치하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겁탈하려는 친일파 열 다섯 명을 손짓 한 번에 추풍낙엽처럼 떨어뜨리고, 오키나와 전투에 징집됐을 때는 잃어버린 연인의 사진을 되찾기 위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사이를 겁 없이 내달린다. 한국전쟁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반공포로들을 숙청하는 친공포로의 잔학함에 분노해 스무 명의 목젖과 정수리와 명치를 삽시간에 강타하고, 전후 밴드마스터로 분해서는 병풍 뒤에서 노래해야만 했던 한 여가수의 반주를 해주다가 총을 들고 설치는 ‘차 실장’이란 자의 얼굴을 후려친다.
소설가 최민석의 신작 장편 ‘풍의 역사’는 굴곡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단옆차기로 가로지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2010년 단편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전작들에서 증명한 바 있는 특유의 B급 유머로 지난 몇 십 년 간 이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각종 사건 사고들을 재해석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월남전, 유신 독재, 광주 민주화 운동, 서울올림픽까지…때로는 기쁘고 대부분은 슬펐던 한국의 상처 많은 역사는 한 유쾌한 뻥쟁이의 대활약으로 인해 한 편의 코미디로 바뀐다.
“이야기 위주의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17일 만난 작가는 얼마 전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잘 돌아가지 않는 목을 가누며 말했다. “‘능력자’가 기교 위주고 ‘쿨한 여자’가 분위기 중심이었다면 ‘풍의 역사’는 이야기를 위한 소설이에요. 그러다 보니 시대적 배경을 1930년에서 1990년까지로 설정하게 된 거죠.”
그는 1950~60년대 전후가 한국 역사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시기라고 말했다. “지난 몇 백 년 간 가장 버라이어티한 생을 산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1930년생이 아닐까요?”
그의 말대로 한국 역사에서 가장 이야기가 풍부해서일까. 근래 나온 국내 소설들은 유독 이 시기에 집중된 것이 많다. 일제시대부터 밀레니엄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숨가쁘게 달리는 성석제의 ‘투명인간’,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을 유머와 풍자의 창을 통해 들여다본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 1980년 5월을 재조명한 한강의 ‘소년이 온다’ 등이다. 이 소설들을 지배하는 주요 정서가 짙은 슬픔과 서슬 퍼런 고발 의식이라면, ‘풍의 역사’는 가볍고 경쾌하다. 빗발치는 총알을 정면으로 맞아 쓰러진 자들 옆에 우스꽝스런 자태로 총알을 피하고 줄행랑 치는 코미디 영화 주인공의 뒷모습 같달까.
“이 시대를 산 이들은 유쾌하게 서술하는 게 아마 힘들겠지요. 하지만 전쟁 중에 슬픔만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에겐 슬픔의 역사가 누군가에겐 허풍의 역사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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