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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입력
2014.09.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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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회가 나왔다. 메인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작은 접시에 담긴 육회가 나온 것인데 육회를 좋아하지 않기에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구석에서 “이 집은 왜 계란이 없어요?”라는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임의 여러 사람이 육회와 그 여성을 번갈아 보며 한 마디씩 했다. “정말 그렇네…” “육회엔 계란이 있어야지”에서 “계란이 없으니 깔끔한데” 등 여운이 이어졌는데, 계란이 없다고 외친 여성이 덧붙였다. “난 어릴 적에 계란 프라이 한 번 제대로 못 먹었다고요. 계란 프라이는 2대 독자에 장남인 오빠만 먹었고 세 여동생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세 자매는 언제나 계란만 보면 먹고 싶어 안달이었어요. 이 나이가 되어도 ‘계란’하면 느낌이 달라요. 이 집 육회에는 왜 계란이 안 나오는지 그것이 궁금하단 말이에요!” 10여 년 가까이 지속된 모임에서 그다지 말이 없던 여성의 격정에 찬 토로는 처음이라 다들 귀가 쫑긋했다. 이후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다른 여성이 덧붙였다. “저는 대접받고 컸어요. 아빠랑 동급이었다니까요. 통닭을 시키면 닭다리는 아빠랑 하나씩 뜯었어요. 그런데 유학시절 닭을 튀겨 식탁에 놓은 다음 부엌을 잠깐 정리하고 왔더니 글쎄 남편이 다리 두 개를 다 먹었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소리 지르고 길길이 날뛰었는지 몰라요. 저의 자존감을 짓밟은 남편을 용서하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남편의 말을 듣고 나니 되레 안쓰러웠어요.” 남편의 말인즉슨 이렇다. 두메산골 출신인 그녀의 남편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도시에 사는 친척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일종의 유학이었는데 남편이 잠이 들면 그 집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몰래 해먹거나 통닭을 시켜먹었다는 거다. 한창 나이에 다른 음식도 물론 먹고 싶었지만 통닭 냄새야말로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다. 문 밖에서 은밀히 벌어지는 통닭 파티가 너무나 부러웠던 남편은 닭요리라면 무조건 좋아하게 되었고 특히 닭다리에 대해서는 일종의 편집증 같은 집착이 생겼다고 했다. KFC건 양념치킨이건 백숙이건 간에 닭다리는 무조건 ‘내 것’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던 남편이 간만에 닭다리를 보자 식탐을 멈출 수 없었다는 일종의 고해성사를 듣고선 그의 만행(?)이 이해되었고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다.

구석에서 빙긋빙긋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있던 나이 지긋한 선배께서 한 말씀 하신다. “내가 모신 ○○화백님께서 세발낙지를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양동이로 하나를 다 드시는 거야. 뻘에서 막 잡아와 꼬물거리는 녀석들을 초장에 찍어 훌훌 드시는데, 얼마나 맛있게 드셨는지 몰라. 침을 삼키며 보고 있는데, 아 이 양반이 한 마리도 안 남기시는 거야 글쎄. 남기신 적도 먹어보라는 말씀도 하신 적이 없어. 한두 번이 아니야. 그때마다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표시도 못 내고 하여간 죽을 뻔했어. 난 그 후로 세발낙지만 보면 눈앞에 보이는 건 모두 먹어 치워야 직성이 풀리게 되었다니까.” 남도 바닷가에서 노 화백님을 오래 모셨던 선배가 낙지에 집착이 있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떡집 근처만 가면 약과를 사가는 통에 집에서 핀잔을 듣곤 한다. 아마도 형제 많은 집에서 자란 덕분에 약과 부스러기 밖에 먹지 못한 어릴 적의 결핍감이 컸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렇다. 사람의 행동엔 다 이유가 있다. 음식은 예에 불과할 뿐 인간의 저 깊은 무의식의 바닥에는 자신도 잘 모르는 흔적과 생채기가 이렇게 깊이 새겨져 있나 보다. 어려서 받은 학대가 얼굴에 써져 있을 리 없고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둔 서러움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띌 가능성도 희박하다. 지하철 성추행범이나 몰카를 찍어대는 자들이 대개 멀쩡한 직업에 소심한 사람들이라는 통계가 실감날 때가 있다. 그들의 역겨운 행동을 두둔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 어떤 결핍과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이 성인이 된 후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얘기할 것 없다. 내 의식의 바닥에는 무엇이 또 어떤 것이 더 숨어있을까. 그래서 언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그것이 알고 싶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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