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행장 퇴진으로 끝낼 일 아니다
이사회 감독당국도 함께 책임져야
국회가 나서 종합적으로 짚어보길
돌이켜보면 임영록 KB금융지주회장이나 이건호 국민은행장(사임)이나 파국을 피할 몇 번의 기회는 있었다. 해피엔딩까지는 힘들었겠지만, 조금만 냉정했다면 혹은 조금만 덜 불운했다면 적어도 이런 비극적 결말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첫 번째 미스는 컴퓨터 문제를 금융감독원으로 가져간 것이었다. 전산시스템 교체(IBM→유닉스)는 온전히 내부에서 다룰 사안인데, 이걸 외부 제재기관(금융감독원)의 손에 넘겼으니 그 순간부터 '평화적 해결'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이유는 있다. “교체결정 과정에 문제가 발견돼 안에서 해결하려 했지만 내부(지주사와 이사회)에서 거부하는 바람에 금감원에 조사를 의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게 이 행장 쪽 입장. 반면 임 회장 측은 “문제가 아닌 걸 자꾸 문제라고 하면서 최종결정까지 뒤집으려는 게 더 이상하다"는 주장이다. 진실게임은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어쨌든 KB 내부의 문제해결 메카니즘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 포인트다.
사실 이 행장 측에선 금감원이 정확히 시시비비를 가려줄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그건 착각이다. 대형금융기관의 넘버원(지주사 회장)과 넘버투(은행장)가 팽팽하게 다투는 이런 볼썽사나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금감원은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는 법이 없으며 통상 양쪽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게 손쉽고 편리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많은 금융계 인사들이 “임 회장과 이 행장 둘 다 죽는 길을 택했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 지난 일이지만, 멱살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은 이 문제를 안에서 풀었어야 했다.
그 이후로도 찬스는 있었다. 어설픈 ‘화해 세레모니'였던 템플스테이를 차라리 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잠자리 문제를 놓고 얼굴을 붉히는 쫀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모두 ‘경징계'로 마무리돼 임기를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제재심의위원회의 경징계 판단 이후 이 쯤에서 사태가 수습되기를 원하는 하필 그 시점에 이 행장이 전산담당 임직원들을 검찰 고발하는 돌출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후 임 회장 또한 당국에 계속 대드는 날 선 행보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모두 지금보다는 형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다 지난 일, 이제 더 이상 복기는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막장드라마'를 보지 않으려면, 역대 CEO들이 모조리 불명예 하차했던 ‘KB 수난사'를 이제 끊으려면, 몇 가지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 번째는 이사회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이자 경영진 견제기구인 이사회는 지주회장과 은행장이 이런 공멸의 ‘치킨 게임'을 벌일 때까지 대체 뭘 했는지. 화해를 시키든 납득을 시키든 아니면 재조사라도 하든 어떻게든 내부에서 해결했어야 했다. 그게 안돼 제재가 불가피했더라도 금감원보다 이사회가 먼저 했어야 했다. 이 점에서 이사회도 무거운 책임을 피할 수 없으며, 두 CEO뿐 아니라 지주와 이사진 모두 사퇴하는 게 옳다고 본다.
두 번째는 감독당국이다. KB사태 내내 금감원에게선 솔로몬의 지혜도, 포청천의 엄정함도 엿볼 수 없었다. 불협화음과 잡음은 KB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 금감원에서도 나왔다. 압권은 경징계(제재심의위)→문책경고(금감원)→직무정지(금융위원회)로 올라간 제재수위였는데, 어떻게 동일 제재대상을 놓고 회의 한번 열 때마다 양형이 계속 높아질 수 있는지. 물론 말 안 듣는 두 사람에 대한 괘씸죄가 더해졌기 때문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솜방망이 징계' 대신 '제멋대로 징계'란 새 오명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KB사태의 원인은 임 회장, 이 행장의 괴팍한 성격 때문이 아니다. 낙하산 논란이 끊이질 않는 인사제도와 제왕적 지배구조, 신뢰 잃은 감독당국 등 우리나라 금융의 난맥상이 뒤범벅된 결과다. 때문에 정부 아닌 국회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청문회를 열어 두 CEO의 선임과정부터, 전산기 교체결정, 금감원ㆍ금융위의 제재배경까지 철저한 사실규명과 책임추궁을 해야 한다. 못지않게 무책임한 지금 국회가 과연 이런 일에 관심이나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 같으면 벌써 몇 번은 청문회가 열렸을 것이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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