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조세제도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흔히 조ㆍ용ㆍ조(租庸調)라고 불리는데, 조는 농지세로 보통 소출의 1/10을 냈으며, 용(庸)은 병역의무를 뜻하는 군역(軍役)을 비롯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역(力役)이다. 조(調)는 공납(貢納)을 뜻하는데,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다. 공납은 원래 내 고장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소박한 개념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느덧 자발적 진상이 아니라 강제 부과로 바뀌면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 논쟁은 부과의 형평성이 논란의 핵심쟁점이다. 부자(富者)가 많이 내고, 빈자(貧者)가 적게 내는 것이 조세 정의지만 부자들이 늘 현실적 힘을 갖고 있기에 정의 실현이 쉽지 않은 것이다.
공납도 마찬가지여서 호조(戶曹)에서 군현과 마을 단위로 부과하는데 호구수가 많은 마을이나 작은 마을이나 부과 액수에 큰 차이가 없었다. 당연히 호수구가 작은 마을들이 불리했다. 마을 단위로 부과된 세금은 다시 가호(家戶)로 나뉘어 부과되는데, 농토가 많은 대농(大農)이나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전호(佃戶ㆍ소작인)나 비슷한 액수가 부과되었다. 결국 소민(小民ㆍ가난한 백성)들의 등골만 휘었다. 여기에 방납(防納)의 폐단까지 소민들을 괴롭혔다. 공물을 각 사(司)에 납부하면 서리들이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는 점퇴(點退)라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각사(各司)의 서리들이 ‘퇴짜’ 놓기 일쑤였다. ‘퇴짜’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는데, 공물의 품질이 낮다는 이유로 그 귀퉁이에 ‘퇴(退)’자를 찍어 물리치는 것이다. 퇴짜를 남발하는 서리 뒤에는 공물을 대납(代納)해주고 인정(人情ㆍ웃돈)을 받아 챙기는 방납업자(防納業者)들이 있었다.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몇 배의 인정(人情)을 주고 방납업자들의 물품을 사서 납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납업자들이 이중 일부를 서리에게 상납하면 서리들은 이중 일부를 벼슬아치들에게 상납하는 먹이사슬 구조였다. 명종 2년(1547년) 8월 사간원에서 “근래 흉년으로 인해서 물가가 오르자 물건이 귀해져서 옛날에 한 필하던 것이 지금은 10배까지 올라서, 물건 하나를 바치는데 가산(家産)을 탕진하게 됩니다. 방납자업자는 이런 기회를 타서 더욱 이익을 노립니다(명종실록 2년 8월 13일)”라고 상소한 것이 이런 현상을 말해준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데도 무능한 조정은 양반 사대부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이 문제를 방관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백성들은 일본군에 대거 가담했고, 조선은 망했다고 본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遼東ㆍ만주)으로 도주하려고 했다. 이때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심정으로 이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았다면 조선을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해결책은 간단한 것이다. 부과 단위를 농지(農地)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고 징수 수단을 쌀로 통일하는 작미법(作米法)을 실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농지를 많이 소유한 대농들은 세금을 더 내고 가난한 전호(佃戶)들은 면제받을 수 있었다. 조광조, 이이(李珥)같은 개혁정치가들이 모두 이를 주장했지만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 때문에 모두 실패했다. 류성룡은 국운을 걸고 훗날 대동법(大同法)이라 불리는 작미법(作米法)을 추진했다. 당연히 반대가 극심했다. 반대는 주로 힘있는 자들에게서 나왔다. 감사, 수령은 물론 부유한 백성들과 서리들까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반대할 명분을 만들기 힘들자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고 여론을 호도했다. 유성룡은 ‘공물작미의(貢物作米議)’, 즉 ‘공납을 쌀로 대신하는 헌의’를 올려 반대논리를 강하게 반박했다. 유성룡은 이 글에서,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수령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감사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힘 있는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서리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유성룡, ‘공물작미의(貢物作米議)’,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14권)”라고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소민들은 찬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조선에서 떠났던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고 망해가던 나라가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이에 큰 불만을 품은 양반 사대부들은 전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유성룡을 공격해 낙마시켰다. 그러나 작미법, 즉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시범실시 되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역사의 흐름이 되었다. 더디지만 역사는 조세정의를 확대하는 쪽으로 흘러왔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도 이런 조세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편법으로 서민들의 호주머니 터는데 익숙하다. 지금도 소득세, 법인세 등의 부자 과세보다는 담뱃세 인상과 주민세, 자동차세 등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겠다고 나오니 불만이 증폭하고 있는 것이다. 유성룡처럼 몸은 극품(極品ㆍ정1품)에 있었지만 마음은 소민(小民ㆍ힘없는 백성)들에게 있었던 참된 재상이 그리운 세상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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