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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대가

입력
2014.09.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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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를 만나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보통 말씀도 아끼시기 때문에 여간 집중을 해서 듣지 않으면 놓쳐버릴 때도 있다. 이상하게 딴 생각도 난다. 솔직히 말해서 대가들의 말이 조리가 딱히 있다고 할 수 없을 때도 있어서다. 선방의 화두처럼.

엊그제 대가를 만났다. 나는 그분을 뵙기 며칠 전부터 설렜다. 그분은 명불허전, 그야말로 대가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냉정하게 비판하지 않네. 그래서 마치 이대로 고사될 것만 같은 생각이 자주 든다네.” 그 분이 말씀하셨다. “아직도 10년은 더 창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내 글이 세상의 젊은 사람들에게 진부하게 보이는 것 같네.” 또 말씀하셨다. “작가는 그 시대와 함께 하는 것인데 이제 내 시대는 간 모양이야. 마치 원로가 되어버린 것 같아.” 그런 말씀을 하실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현재도 끊임없이 작품을 쓰신다. 투지가 있으셨다. 그러나 실마리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깊은 고민에 빠져 계신 듯했다. 당황스러웠다. 대가 아니신가. 말씀을 듣던 중에 난감해 어떤 대화도 잘하지 못했다. 대개가 그렇지 않은가. 해당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업적을 이룬 대가에게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집에 오는 중에, 오고 나서도 한동안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시간이 더 흐르고 그 때도 여전히 연극을 계속하고 산다면 언젠가는 나도 여지없이 당면해야 할 문제였다.

나는 연극에 대해 대가만큼 제대로 알지 못할 뿐더러 경험도 일천하다. 당연히 인생도 덜 살았으니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도 떨어진다. 내 나이조차도 ‘요새 트렌드나 젊은 감각을 제대로 소화 못하는구나’라고 늘 절감하는데, 항차 20년을 더 사신 그분이야 일러 무엇 하겠나. 그런데. 대가께서는 정작 창작의 고민에 빠져계시는 것 같지 않았다.

불안이었다! 노년이 되시면서 느끼는 불안한 심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타인의 충고 가운데 ‘불안해하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는 대개가 공염불 아닌가. 말이 필요 없이 스스로가 빠져 나와야 한다. 특히 불안은 내면에서 일어나니 어떻게 해볼 딴 방편이 없다. 언제까지나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을 불살라 창작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그래서도 안 되는 듯하다. 세월을 따라 사유와 문체의 호흡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관심사를 풀어가는 해법도 당연히 세월을 따라 노련해질 테고. 느리지만 더 단단해서 감동의 두께가 다를 것이다. 하니 대관절 무슨 상관이랴.

경험할수록 선명해진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서는 창작의 기틀이 안 잡힌다. 좋은 글을 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내 안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이야기를 강태공처럼 낚아야 한다. 무에서 유를 억지로 창조할 일도, 그렇게 하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있는 것을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바라보는 중에 자연히 얻어진다. 대가께서 설마하니 그것을 모르셨을까. 맞다. 단언컨대 절대로 모르지 않으셨다. 하지만 무언가 다른 조바심이 그분의 내면을 꽤 차지한 듯 보였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 차이도 아니다.

동료작가들과 자리를 하다 보면 창작의 산고를 무용담처럼 듣는다. 아닌 게 아니라 잘 안 써질 때는 심히 고통스럽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 보면 고통보다는 카타르시스가 훨씬 더 많다. 그렇지 않다면 뭐 하러 이런 고단한 직업에 종사한단 말인가. 마치 마법처럼 일어난다. 세상이 축복하듯이 말을 걸어온다. ‘내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저 그 이야기를 받아 적으면 된다. 욕심을 낼 필요도, 무엇을 더 조작할 필요도 없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만 기울이면 끝이다. 때가 되면 어느 순간 마차가 부서지듯, 물방울이 터지듯 한 줄도 안 나가는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그때 가서 할 고민이다. 선생님께 그 때 못 드렸던 말을 여기에 당돌하게 적었다. 외람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가시여, 불안해 마세요. 당신은 여전히 추앙받고 계십니다.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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