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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낙하산보다 지휘관이 문제다

입력
2014.09.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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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부터 2013년까지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5번이나 연임했던 재보험사 코리안리의 박종원 전 사장. 그는 재임 시절 사석에서 “나는 낙하산이었다”는 말을 주저하지 않았다. 관료(재정경제부) 출신이란 비아냥 속에 출발했지만 그는 부도 직전의 회사를 아시아 1위, 세계 10위권의 잘 나가는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지금 돌이켜보면 ‘낙하산이라도 제대로만 하면 문제될 것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취임 첫해 전 직원의 3분의 1을 구조조정하면서 그는 새 자리에 인생을 걸었다. 자신에게 자리를 내 준 정치권의 청탁조차 거절하며 원칙 인사를 고수해 직원들의 신뢰를 얻었다. 외부의 힘으로 자리에 앉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철저히 그 조직의 사람이 된 것이다.

언뜻 들으면 낙하산이 꼭 잘못은 아니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박 사장은 금융권에서도 ‘특수한’ 경우였다. 그가 맡은 회사는 은행 같은 거대 조직이 아닌 재보험사였고, 자신을 다시 신임해 줄 오너가 확실했으며 그의 자리를 탐내는 더 힘센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낙하산 논란으로 시끄러운 KB금융 사태는 그래서 코리안리의 사례와는 사뭇 다르다. 혹자는 이번 사태를 개성 강한 두 CEO(지주 회장, 은행장)의 갈등 탓으로 돌리지만 금융을 오래 지켜 본 이들은 KB가 오늘날에 이른 이유로 주저 없이 낙하산 인사를 꼽는다. KB 사태는 예견된 재앙이었다는 것이다.

이유를 한 번 따져보자. 은행은 방대한 예금ㆍ대출 규모만큼이나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CEO가 조용히 경영할 환경이 되지 않는다. 뚜렷한 오너도 없다. 최대지분을 10%로 제한하다 보니 일대 주주라도 경영자를 택하기 어려운 구조다. 자칫 감독권을 쥔 정부가 사실상 주인 행세를 하기 쉽다. 권한 많은 CEO 자리는 자연히 늘 누군가 탐내는 사람이 생긴다.

KB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됐다. 정부 지분이 단 한 주도 없는 순수 민간 회사, 정부가 인사에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음에도 CEO가 바뀔 때마다 ‘실세가 밀어주는’ 인사들이 하마평에 올랐고, 그 중 한 사람이 자리를 꿰찼다.

사실 낙하산들은 하나하나 떼 놓고 보면 나무랄 데 없는 실력파들이었다. 30년 금융맨부터 유명대학 총장, 고위 경제관료 출신까지…. 하지만 그들이 자리를 잡으면 늘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김없이 대규모 물갈이 인사가 단행되고, 좋은 말로 하자면 야심 차지만 다분히 홍보성인 사업들이 추진됐다. 취임 초기엔 금융당국조차 두려워하는 권위를 뽐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당국의 갖가지 조사에 시달리는 혐의자 신세가 된다. 결국 초라한 행색으로 쫓기듯 물러나는 게 역대 낙하산 CEO들의 전형이었다.

힘 좋은 뒷배가 있다는데 왜 그렇게 탈이 많을까도 싶지만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낙하산이 가능한 자리로 인식되는 순간, 더 센 힘을 등에 업은 후계자들이 끊임없이 그 자리를 노린다. 낙하산 후배들은 결코 임기가 끝날 때까지 점잖게 기다리지 않는다. 재임 중에도 온갖 트집을 잡게 마련이다.

아랫사람들은 어떨까. 언제 바뀔 지 모를 낙하산 CEO에겐 실적보다 얼굴을 알리는 게 먼저다. 여러 낙하산 중에 누가 살아남을지, 다음엔 누가 올지를 먼저 생각한다. 묵묵히 나를 알아주길 기다리다간 바보 되기 십상이다. 이것이 불과 7년여 만에 KB금융에서 ‘리딩 뱅크’라는 수식어가 사라진 이유다.

뭔가 제도를 바꿔서 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전문가들도 갖춰질 인사 시스템은 이미 다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치권력을 잡은 ‘지휘관’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부득불 낙하산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해도 적어도 금융권, 더구나 민간회사 CEO는 투하 지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다.

쉬운 얘기 같지만 실력자들에겐 이게 절대로 쉽지 않은 모양이다. 모두가 “더 이상 낙하산은 곤란하다”고 해도, 본인들은 “절대 낙하산이 아니다”고 버티고 CEO를 선임하는 이사회는 “심사숙고 끝에 가장 훌륭한 분을 모셨다”고 한다. 이래서야 금융사가 잘 굴러가겠는가. 차세대 성장동력이든, 창조경제의 버팀목이든 우선은 금융사가 건강해야 가능한 법이다.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사에서 열린 KB금융지주 제6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는 임영록 대표이사.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사에서 열린 KB금융지주 제6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는 임영록 대표이사. 연합뉴스

김용식 경제부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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