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만 좀 희끗희끗하지 그대로야.” 벌써 15년쯤 지난 일이다. 난생 처음 남의 나라에 발을 디뎠고 몇 주 후 돌아가는 투어나 여행이 아니라 수년을 살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그가 처음 만난 외국,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20대였던 청년은 과일과 긴 바게트 빵 하나 사 들고 동네 슈퍼마켓에서 파는 꿀 찍어 먹으며 하루씩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택시를 타고 갈 정도로 무모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달싹거리며 입을 떼봐도 문장이 되어 나오지 않는 영어니 기차표를 살 일도, 내려서 물어가며 목적지를 찾아갈 일도 막막했을 터. 차라리 주소를 보여주면 집 앞까지 달려주는 택시가 당시 청년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국내외 많은 무용가들이 서고 싶어하는 뒤셀도르프의 탄츠하우스(무용의 집). 이제 중년이 된 청년이 자신 있게 영어로 인사도 건네며 무용수로 섰던 바로 그 무대에 안무한 작품을 갖고 돌아왔다.
매년 세계 곳곳에서 연극, 무용, 음악 등 공연예술작품을 사고파는 장터가 열린다. 이를 아트마켓 혹은 견본시라 부르는데 1984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해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부터 서울아트마켓이 매년 10월 개최되고 울산에서는 에이팜이라는 음악전문 마켓도 열린다. 대부분 아트마켓이 해외진출을 목적으로 자국 공연예술작품 소개에 집중하는데 반해 전세계 예술인을 대상으로 쇼케이스 참가를 공모해 더 유명한 것도 있고 장르특화로 명성을 얻은 것들도 있다. 그 중 뒤셀도르프에서 격년제로 열리는 탄츠메세는 세계 무용 조류를 소개하며 관계자들이 교류하는 대표적 무용전문마켓이다. 탄츠와 메세 즉 무용과 전시를 합성해 행사명으로 사용하며 올해 20주년을 맞은 탄츠메세에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주최로 2008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특집이 열려 국내 5개 무용단이 공연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다. 기왕이면 칭찬받겠다고 덤비는데 박수도 기립으로 받아야 성에 차고 다른 나라와 무대를 함께 써야 하면 오기가 발동하니 나도 그렇다. 이국문화의 풍요로움 앞에 우리 공연을 내놓으며 ‘한국문화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 이제와 놀라운 천재가 나타난다 해도 늘 있는 새로움에 익숙해 더 충격 받을 일도 없을 테니 서양이 그들의 안목으로 재단해 만들어놓은 무대에서 질(質)과 실력으로 승부해 제값을 받고 싶은 것이다. 올 탄츠메세에서 한국 공연은 칭찬도 박수도 챙겼다. 저마다 “첫 번째 작품이 좋더라” “세 번째가 매력적이다” “아니, 다 좋다”며 축하인사를 건네오니 밤마다 맥주파티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날 안무가로 돌아간 청년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행사기간 공연한 60개 작품 중 어느 것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자리에서 엉덩이 뗄 생각을 않던 관객이 발을 구르며 일어선 것이다. 2010년 폴란드에서 초연해 햇수로 5년을 갈고 닦고 묵히고 삭히며 판소리 수궁가와 전통 타악에 맞춰 추는 정교하고 속도감 있는 현대무용으로 유럽에서 아시아, 남미에 이르기까지 기립박수를 거르지 않고 받아왔던 작품. 어쩌면 누군가의 리뷰처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저 하고 싶은 말을 다해낸 것’이 열쇠였을 수도 있겠다.
한국음식에는 한참 뜸을 들여야 제 맛을 내는 것들이 유난히 많다. 된장, 고추장, 간장… 색깔도, 맛도, 이름도, 개성도 다른, 한마디로 우리가 장(醬)이라 부르는 것부터 각종 젓갈들까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간 정성스레 묵히고 삭힌 후에야 식탁에 올라올 수 있다. 누구나 새로운 것에 흥분하지만 참고 인내한 후에야 진가를 발휘하는 우리 음식처럼 이번에 성과를 거둔 작품 중에는 7년 전에 만든 것도 있다. 5년, 7년 된 두 작품 모두 싸구려 호텔에 피곤한 몸을 누이며 뜨거운 여름 해에 달궈진 대리석 바닥에 살갗이 데는 것도 마다 않고 춤추며 여러 대륙을 돌고 돌아왔다. 서울아트마켓 10년 국제교류는 가속도가 붙었고 선배들의 고생은 국제무대를 향해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이제 후배들이여, 그대들은 보다 편하게, 그러나 곰삭은 작품으로 그 다리를 건너기 바란다.
김신아 아트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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