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법시스템은 사건의 실체를 찾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선조들이 고심해서 만들었다. 먼저 조선은 수사권을 가진 수사기관을 여럿 두었다. 지금의 검찰 비슷한 수사기관은 사헌부(司憲府)였다. 그런데 지금의 법무부격인 형조(刑曹)와 의금부(義禁府)도 수사권이 있었다. 의금부에 대해 경국대전 ‘리전(吏典)’은 “(의금부는) 임금의 명을 받아 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맡는다”라고 규정해서 사헌부 같은 전방위적인 수사기관이 아니라 임금의 특명만 수행하는 특별수사기관으로 설정하고 있다. 서울시에 해당하는 한성부(漢城府)와 포도청(捕盜廳)도 수사권이 있었지만 주로 양반 사대부가 아닌 일반 상민(常民) 관련 사건을 담당했다. 이렇게 수사권을 분산시킨 것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사헌부에서 사건을 덮으려는 낌새만 보여도 곧바로 사간원(司諫院)에서 탄핵에 나섰다. 그러면 의금부나 형조가 수사에 나서므로 ‘봐주기 수사’가 있을 수 없었다.
더 절묘한 것은 수사기록을 보고 형량을 판결하는 일은 잡과(雜科) 출신들의 관청인 사율원(司律院)에서 담당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장관(長官)의 직급에 따라 관청의 품계도 정해지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의금부는 종1품, 형조ㆍ한성부는 정2품, 사헌부는 종2품 관청이었다. 반면 사율원에서 판결을 담당하는 명률(明律)은 종7품, 심률(審律)은 종8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전문성은 철저하게 보장했다. 사헌부나 의금부 같은 수사기관에서 수사기록인 문부(文簿)를 보내오면 사율원은 경국대전(經國大典) 대명률(大明律) 율학해이(律學解?) 같은 법률서를 가지고 조율(照律ㆍ죄를 법률서에 대조함)해서 판결했다. 특정 범죄에 해당하는 법조문을 정률(正律)이라고 하는데, 딱 들어맞는 정률이 없을 경우 가장 비슷한 법조문을 끌어다 사용했다. 이를 비의(比依)라고 한다. 태종 14년(1414년) 8월 경기우도 수군 소속의 배가 풍랑을 만나 29명 중 10명이 익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태종은 책임자인 경기우도 수군 첨절제사(僉節制使) 송득사(宋得師)의 책임을 묻게 했다. 그런데 대언(代言ㆍ승지) 조말생(趙末生) 등이 사율원의 박상간(朴尙幹)을 시켜 가벼운 법조문에 비의(非依)하게 했다. 태종은 열 명이 수장된 사건의 책임자를 봐주기로 판결했다고 화를 내면서 형조에 다시 조율을 명했다. 형조에서는 고신(告身ㆍ임명장)을 거두고 장(杖) 100대에 수군(水軍)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새로운 판결을 내렸다. 태종은 조말생 등의 승지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송득사는 장(杖) 100대는 면제시키는 대신 경기우도 수군에 충당시켰다. “뒷사람들을 경계하게 하고,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종3품 첨절제사로서 지휘하던 바로 그 부대의 수군으로 충군(充軍)된 것이니 그 부끄러움은 말할 것이 없었다.
선조들이 잡과 출신에게 판결을 맡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재량권을 행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수사는 대과(大科) 출신의 사헌부나 의금부에 맡기고 판결은 잡과 출신에게 맡긴 이유는 재량권 따위를 생각하지 말고 법조문대로 판결하라는 뜻이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판결을 두고 세상이 시끄럽다. 판결문을 비롯한 모든 글의 기초는 논리의 일관성인데, 같은 사안을 두고 국정원법은 위반했지만 선거법 위반은 아니라고 상반되게 판결했으니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같은 판사인 수원지법 김동진 부장판사가 “법치주의는 죽었다”면서 “궤변이다!”, “헛웃음이 나온다”라고 비판할 정도니 그렇지 않아도 이 나라 사법시스템을 불신하던 보통 사람들의 반응이야 말할 것도 없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도응(桃應)이라는 사람이 맹자(孟子)에게 “순(舜)임금 때의 법관인 고요(皐陶)라면 어떻게 했겠는가?”라고 묻는 이야기다. 도응은 맹자에게 “고요가 법관(士)으로 있는데 순 임금의 부친 고수(??)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라고 물었다. 맹자는 “법대로 집행할 따름이다”라고 간단하게 답변했다. 현 임금의 부친이라도 살인을 했다면 법에 따라 죽이는 것이 법의 정신이란 뜻이다. 이것이 동양 전통사회의 법 정신이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이미 실형을 살았다. 권력자의 거듭된 범죄 행위를 서경(書經) ‘우서(虞書)’에 조율(照律)하면 ‘호종적형(?終賊刑)’에 해당한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다시 범행하면(終) 도적으로 다스려 죽인다’는 뜻이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 ‘형법(刑法)’조에서 “법(法)과 이(利)는 서로 승제(乘除)가 된다”고 말했다. 법이 무거우면 이(利)는 가볍게 되고, 이가 무거우면 법이 가볍게 되는 상호모순 관계라는 뜻이다. 판사가 이(利)를 선택하면 국민들은 법을 가볍게 여기면서 불복 대상으로 삼는다. 법치주의는 외부의 압력뿐만 아니라 법원 내부의 사익 추구에 의해서도 무너진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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