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은 미래를 위한 도전
혜초의 실크로드가 미래로
해양탐험대, 마침내 대장정에
어렸을 적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를 읽으며 해저 탐험을 꿈꾸었다. 잠수함 노틸호를 타고 전 세계 바다 속을 누비고 다니는 네모 선장도 부러웠지만, 동행한 해양생물학자 아로낙스 박사의 해박한 해양지식은 더욱 부러웠다. 해저탐험을 꿈꾸던 소년은 30여 년 후 프랑스 심해유인잠수정 노틸을 타고 태평양 수심 5,000㎙가 넘는 곳에 내려가 과학탐사를 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였던가?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우연치고는 너무 필연처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잠수정을 타고 말이다.
탐험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행동이다. 초창기 해양과학 발전은 몇몇 과학자의 목숨 건 탐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872~76년 영국의 해양동물학자 찰스 톰슨경이 이끈 챌린저호 탐험은 최초의 해양과학탐사로 평가받는다. 지구 둘레의 약 3배에 달하는 12만7,580㎞를 항해하며 바다 깊이를 측량하고, 바닷물 온도를 재고, 해양생물을 채집했다. 이 항해로 약 4,700종의 해양생물이 새롭게 발견되었으며, 심해에는 생물이 살지 않는다는 심해무생물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다. 항해 결과는 총 2만9,500쪽이 넘는 50권의 보고서로 발간됐다. 이 보고서는 지금도 해양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보다 앞선 1831~36년 비글호에 승선해 탐험 항해를 했던 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은 비글호 항해기와 종의 기원을 남겼다. 특히 생물 진화를 기술한 종의 기원은 생물학사에 혁명적인 파장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유명한 명저이다. 이 역시 비글호 탐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르웨이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난센은 1893~96년 프람호를 타고 북극해를 탐험해 북극은 대륙이 아니라 바다임을 밝혔다.
탐험은 이처럼 대단한 유산을 남겼다. 이제 해양실크로드 탐험대는 1,000년도 훨씬 전에 혜초를 비롯한 신라인들이 오고 갔던 역사적인 바닷길을 가려 한다. 마침 오늘이 출항하는 날이다. 우리는 이번 탐험으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탐험대원으로 뽑힌 대학생들은 각자 전공 분야를 배경으로 해양실크로드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 분석하게 된다. 모든 탐험 과정은 책과 영상물로 기록된다. 프랑스 학자 펠리오가 1908년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을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혜초가 실크로드에 남긴 발자취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의 수명은 유한하지만 기록으로 남긴 글의 생명은 무한하다. 기록이 남아 있었기에 1,3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혜초가 갔던 길을 이야기한다.
탐험대가 지금 가려고 하는 바닷길을 해양실크로드로 부를 것인지 해상실크로드로 부를 것인지 학계에서 논란이 있다. 바람을 이용해서 범선을 타고 오갔던 길은 바다 위의 길이니 해상실크로드가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를 내다본다면 넓은 의미의 해양실크로드가 더 어울릴 듯하다. 해양과학기술의 발달로 바다 속으로 잠수함이나 잠수정이 다니고 있다. 지금은 주로 군사적인 목적이나 과학탐사용으로 활용되지만, 미래에는 물류 기능을 할지도 모른다. 이런 바다 속 길은 해상실크로드가 아닌 해중실크로드라 불러야 할까?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거나 일본의 홋카이도와 혼슈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도 교량과 해저터널로 경남 거제도와 부산 가거도를 연결하는 바닷길이 열렸다. 최근 한반도와 제주도를 해저터널로 잇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심지어 우리나라와 중국, 우리나라와 일본을 해저터널로 연결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앞으로 지구 곳곳에 더 많은 해저실크로드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만들어질 바닷길을 해양실크로드라고 부른다면, 굳이 해상실크로드, 해중실크로드, 해저실크로드로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탐험대는 고대 문명 교류의 역사적인 바닷길을 과학으로 포장한 첨단 해양실크로드로 바꿀 초석을 놓을 것이다.
김웅서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ㆍ해양실크로드 탐험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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