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잠시 보험회사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카피라이팅이었다. 하지만 나중엔 거의 외판원 임무까지 도맡았다. 내가 그때 조금 말주변이 좋았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생에 닥칠 불안을 설명하는 일에 능했을 텐데… 한국의 유명 보험회사는 외국보험회사에서 임상을 거친 약정을 베낀 후, 그걸 한국인에게 적용하기 쉽도록 알고리즘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보험 약정은 대부분 남아 있는 삶에 대한 가정들이다. 대략 80년 정도의 평균치 삶을 시간대로 나눈 후, 곳곳에 위험하다는 경고메시지를 붙이는 게 보험회사의 기본 컨셉이다. 연구실에서 볼펜꽁지로 귀를 파고 있던 삼류 언어학자와 통계학자, 인류학자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뒷돈을 주고 약정을 조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불안을 만드는 일에 이 세 분야의 전문가들이라면 가장 훌륭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니까.
19세기까진 다이아몬드 광산이 가장 오래 살아 남을 사업처럼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언젠가 어떤 잡지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독일의 광부들에게는 청바지 뒷주머니에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를 넣고 갱도로 들어가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4번째 책이라고 들은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 말이다!
광부들은 혹시나 산사태가 나거나 갱도가 막혀 구조를 기다리는 시간에 일생 시간을 연구한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를 헬멧의 랜턴을 켜놓고 읽는다는 기사였다. 캄캄하게 막힌 갱도 안에서 지루한 구조의 시간을 견디며 기도를 하고 있는 것 보다는, 일생에 한 번쯤 그 학자처럼 시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일이 더 낫다고. “이제부터 다가올 시간은 정말 엄청난 것일 테니까…” 하이데거냐 하나님이냐의 선택 앞에서 그들은 하이데거를 선택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광부였다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테지만, 기도를 해서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하는 것 보다는 광부들에겐 그 편이 나은 보험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쩌면 보험회사를 최초로 생각해 낸 사람은 아마도 이 광부들의 마음 같은 것을 헤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광부들이 모두 우주의 별이 되어버린 지금은 우리에게 보험회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나는 보험약정을 각색해 주며 인류사의 불안을 연장하는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우리 주변에 보험이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다. 보험회사에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고객이 보험 약정 비밀의 실체를 알아차릴 즈음, 보험회사는 해마다 약정을 조금씩 수정해가며 생명을 유지해 간다. 인류가 살아 있는 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기업은 보험회사일 공산이 크다. 보험회사는 엄청난 인류애를 품은 나머지, 인간의 불안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우주전쟁에 대비한 우주보험도 곧 만들 것이고, 죽으면 은하계에 뼛가루를 뿌려주는 우주장도 전 세계로 장례사업화 할 것이다. 우주전쟁 중에는 대박 날 사업이기 때문이다. 우주전쟁 중에는 필요하다면 특약을 만들어 우주 생명체와 협상해서 아이들을 상자에 담아 먼 우주에 파는 일도 실행할 것이다. 인류의 미래가 불안하지 않고 휴머니즘을 확장하기 위해서라면 보험회사는 아이들은 동의 따위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이들은 보험회사에겐 주요 고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보험은 14세는 돼야 가입할 수 있으니까. 부모의 동의만 존재한다면 보험회사는 파충류라도 보험에 가입시킬 수 있다. 크리스마스 같은 날도 음주 사고가 1년 중 가장 많이 나는 날로만 보험회사는 기억하니까. 대충 이 정도가 보험이 유령인 이유다. 보험은 유령 같은 것이다.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실체가 없다. 꼭 이 정부 같다. 정부와 보험회사는 항상 함께 대의를 공유하니까. 정부는 늘 어디든 보험을 들어 놓는다. 자신들을 몰라보도록 유령과 아주 수 백 년 전부터 거래를 해놓았을 테니까.
김경주 시인·극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