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ㆍ237쪽ㆍ1만2,000원
영화감독 신상옥의 존재는 납북이란 수식으로 처음 알게 됐다. 1984년 신문과 방송은 떠들썩했다. 행방이 묘연했던 신 감독이 아내인 배우 최은희씨와 1978년 납치돼 북에 머물고 있다는 보도는 남한 사회를 흔들었다. 북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충격과 공포로 전율하던 시절인데 납치라니. 참 불운한 사람들이라 어린 시절 생각했는데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사진 속 신 감독과 최씨는 폭죽 같은 미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어린 마음에 또렷이 남았다.
1986년 두 사람은 한반도 남쪽을 또 깜짝 놀라게 했다. 체코에서 북한 공작원들을 따돌리고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는 긴급 보도가 세계에 퍼졌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납북, 김정일, 탈출, 망명 등 영화와 무관한 단어들이 신 감독의 연관어였다.
머리가 굵고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우며 신 감독의 진모를 조금씩 알았다. ‘로맨스 빠빠’와 ‘성춘향’ 등 1960년대 그의 히트작들을 접하며 충무로 영화 제왕의 삶을 가늠할 수 있었다.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해 살다간 신 감독의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나온 자서전을 통해 확연히 알았다. ‘난, 영화였다’는 제목부터가 영화에 중독된 한 사나이의 뜨거운 연대기를 껴안는다. 과연 나는 내 일을 얼마나 충실하게 하며 살고 있을까, 저절로 자문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은 신 감독의 영화계 입문부터 ‘최 여사’(신 감독은 책 안에서 최은희씨를 줄곧 이렇게 표현한다)와의 인연, 남북 영화계와 할리우드에서 겪은 일들로 채워진다. 영화에 인생을 건 한 청년이 절치부심하다 경제 발전에 올라타 충무로의 제왕으로 활동하던 시기가 명멸한다.
영화와 정치권의 유착을 엿볼 수 있다. 신 감독은 신예 시절인 1959년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을 연출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승만 대통령을 선전하기 위해 정치권의 강압으로 만든 영화였다. 정치 깡패 임화수의 반공청년단이 제작했고 경무대 경호실장 곽영주가 후원했다. 신 감독이 기선이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전화 한 통에 기선이 바로 동원됐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영화를 만들 때도 비슷했다. 진짜 열차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는 장면을 찍고 싶다 했더니 바로 허가가 나왔다.
북한과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이 특히 눈에 띈다. 신 감독은 2년 반 동안 영화를 만들면서 북한 영화 역사에 여러 차례 ‘최초’를 기록했다. ‘돌아오지 않은 밀사’는 북한 영화 사상 최초로 해외 로케(체코)로 촬영했다. 이 영화는 북한 영화로선 처음 배우와 제작진의 이름을 넣기도 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 이외엔 국민에게 인기를 끌거나 유명해져서는 안 된다는 인식 때문에 북한 정부는 크레디트를 금지시켰었다. 신 감독은 북한 첫 괴수영화 ‘불가사리’를 만들기도 했다.
유신정권과 불화했던 신 감독의 영화사 신필름은 1975년 허가 취소됐다. 신 감독의 납북을 월북으로 해석하는 영화계 원로가 적지 않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던 신 감독의 삶을 보면 무리가 아니다. “… 장롱을 때려 부수는 장면이 있었다. 소품으로 준비한 장롱이 마음에 들지 않은 신 감독은 자신의 집 안방에 있는 장롱을 내 오라는 것이었다… 최 여사가 무척이나 아끼는 물건이었다. 결국 그 장롱은 소품으로 등장하여 부서졌고…”(195쪽). 원로 영화제작자 황기성씨의 회고다. 영화에 미쳐 분단까지 넘어섰던 사람다운 에피소드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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