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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일왕 히로히토는 무죄인가?

입력
2014.09.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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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7월 2일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이 일왕 히로히토(裕仁) 앞으로 내각 총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발단은 한 해 전인 1928년 6월 4일 심양(瀋陽) 부근 황고둔(皇姑屯) 근처에서 발생한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 폭살사건이었다. 장작림이 열차 폭발로 두 손과 두 발이 날아간 채 숨을 거둔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숨지기 직전 장작림은 “일본군이 한 짓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직전까지도 그는 일본의 주구였다. 중국의 권력자들 중에는 한국 독립운동자들에게 우호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장작림은 달랐다. 그는 1925년 자신 휘하의 봉천성(奉天省) 경무처장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 사이에 ‘한인(韓人) 취체(取締ㆍ단속)에 대한 쌍방협정’을 체결하게 했다.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이라고 불린 이 협정의 요체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서 조선총독부에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 이후 참의부 참의장 출신의 김승학(金承學),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赫)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조선총독부로 넘겨졌다. 장작림은 나아가 일본의 후원을 얻어 전 중국의 패자를 꿈꾸며 북경으로 가서 1927년 북양정부(北洋政府)의 총통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에 나서자 세 불리를 느끼고 만주로 퇴각하던 중 폭살 당한 것이었다.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쓸모가 없어진 장작림을 제거하고 직접 만주를 지배할 계획이었다.

일본 정부는 ‘장작림 폭살사건’이란 표현 대신 ‘만주 모 중대사건’이라고 표현하면서 현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두 아편쟁이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국제 여론이 들끓자 중일 합동조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관동군의 소행이란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두 명의 아편쟁이의 시신은 관동군의 조작이며, 폭파에 사용된 전선이 일본군 초소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조선주둔군 기리하라(桐原貞壽) 중위가 조선에서 200㎏의 화약을 들여와 폭살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평소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장작림의 군사고문 마치노 다케마(町野武馬) 예비역 대좌는 같은 열차를 타고 가다가 천진에서 미리 내렸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관동군의 고급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ㆍ패전 후 전범으로 수감 중 병사) 대좌가 중대장 도우미야(東宮鐵男)를 시켜 장작림을 폭살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1927년 4월부터 총리로 재직하고 있던 다나카 기이치는 사건 반년이 지난 1928년 12월 14일께 일왕에게 고모토 다이사쿠의 소행이라면서 엄벌에 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육군을 중심으로 처벌 반대론이 일어나자 1929년 5월 14일 고모토를 일본 본토로 전근시켰다가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종결지었다. 그리고는 일왕 히로히토에게 “장작림 폭살사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경비상의 감독 책임을 물어 전보시켰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히로히토가 “앞의 보고와 다르지 않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내각총사직을 단행했던 것이다.

히로히토의 문제 제기 한 마디에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일왕의 지배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은 정부 정책에 불만이 있어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전쟁책임론을 부인하는 소재로 이용했지만 변명일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프러시아(독일) 헌법을 모방해서 만든 메이지헌법(明治憲法ㆍ제국헌법) 11조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였고, 12조는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編制)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였다. 원래는 “육해군의 편제는 칙령(勅令)으로 정한다”였지만 이 경우 칙령을 심의하는 추밀원(樞密院)에서 군부를 일부 통제할 수 있게 되므로 육해군의 편제 및 군사 숫자까지도 일왕이 결정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일본 군부는 일왕에게 직속된 군대지 내각에 소속된 군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각의 지시 없이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 군부가 벌였던 모든 군사침략은 일왕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는 법리가 성립한다. 최근 일본 궁내성에서 소화천황실록(昭和天皇實錄)을 발간했는데, 일왕은 A급 전범이 합사된 것에 불만을 품고 이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히로히토는 이미 1990년 문예춘추(文藝春秋)에 발표한 ‘소화천황독백록(昭和天皇獨白錄)’에서 자신의 전범 혐의를 부인했는데, 그 연장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萬歲ㆍ천황폐하만세)!”를 외치며 죽어갔고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현재도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일왕을 비판하는 인사들에게 살인을 포함한 각종 테러를 가한다. 일본이 문명국이 되지 못하는 문제의 뿌리가 패전 후 전범으로 일왕을 처벌하고 천황제를 해체시키지 못한 데 있다. 아베 같은 극우파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뿌리도 여기에 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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