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메밀꽃 필 무렵’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미리 책을 읽고 왔다는 여중생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친자확인’이었다. 채동욱 전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논란이 한창 불거질 무렵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효석문학관 해설사 민종일(70)씨는 손녀뻘인 학생의 당돌한 답변에 허허 웃고 말았는데, 내심 그가 듣고 싶은 대답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실제 고향인 봉평을 배경으로 한 것부터 여울목-노루목고개-충주집-물레방아 등, 초등학교 졸업 후 떠났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 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소설 속의 이 한 대목으로 평창 봉평은 메밀과 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영동고속도로 장평IC에서 ‘이효석문학관’까지 약 8km 거리의 국도변 곳곳이 메밀 밭이다. 문학관에서 생가를 거쳐‘문학의 숲’에 이르는 약 2km구간은 이효석을 되살린 공간이다. ‘이효석마을’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효석 문학관은 봉평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았다. 전시관에선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대표되는 토속적인 작품 경향과 달리 그는 서구지향적 모더니스트였다. 평양 숭실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거주했던 ‘평양 집’ 내부 사진을 실물 크기로 재현한 전시물이 인상적이다. 벽에 걸린 프랑스 여배우 다니엘다리유의 사진이 특히 눈길을 끈다. 1938년엔 이 ‘스크린의 여왕’에게 영문으로 편지까지 썼단다.‘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은 나날의 삶과 예술이다’라고 했다는 그의 삶처럼 빨간 벽돌 건물도 정원도 유럽의 작은 수도원 같이 정갈하고 아담하다. 정원 한 켠에 세운 집필 모습 동상은 기념사진을 찍는 명소다. 다만 배경이 메밀 밭이 아닌 점이 아쉽다.
문학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생가와 ‘평양 집’을 복원해 놓았다. ‘푸른집’이라는 이름과 달리 빨간 지붕이다. 원래 생가는 이곳에서 약 500m위쪽이다. 지금은 사유지이어서 겉모습만 볼 수 있다. 일대에는 메밀 밭 주위로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심어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그곳에서 2km 떨어진 ‘이효석 문학의 숲’ 초입의 언덕길부터는 본격적으로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로 꾸몄다.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넘어가는 허생원 일행이 걸었던 길처럼 산자락이 가까워질수록 메밀꽃은 더욱 풍성해져 “소금을 뿌린 듯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렇다 할 연애 한번 못해본 허생원이 성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을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라며 두고두고 되새김질 하듯 그리움이 하얗게 망울져 피었다. 14일까지 ‘평창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으니 메밀꽃은 지금이 절정이다.
문학의 숲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충주집과 물레방앗간뿐만 아니라 주요 장면을 실물 인형으로 재현해 조붓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실제로 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가을이 무르익으면 메밀꽃은 지고 없겠지만 낙엽송이 노랗게 물드는 헛헛한 풍경에 그리움은 한층 짙어질 것 같다. 이효석 문학의 숲은 휘닉스파크에서 출발하는 ‘고랭길’중간에 있다. 해발 600m가 넘는 이 지역의 특성을 살려 붙인 이름이다. 옛날 봉평장을 보기 위해 면온 사람들이 넘던 고갯길을 삼림욕을 즐기며 걷는 길로 되살렸다.
원시의 숲 회령봉과 가을이 손에 잡힐 듯한 휘닉스파크
‘이효석’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아쉽다면 인근의 휘닉스파크나 회령봉 등산으로 여정을 채울 수 있다. 한적함을 즐기려 여름스키장을 찾는 이들이 꽤 된다. 10분여 곤돌라를 타고 오르면 슬로프 정상엔 가을이 미리 와 있다. 곤돌라 아래로는 구절초가 지천이다. 태기산 자락 정상에는 하늘정원을 꾸몄다.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이 먹이를 주며 즐길 수 있게 작은 규모의 양과 염소 토끼 목장을 갖췄다. 더없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양털보다 더 몽실몽실한 구름이 손에 만질 듯이 가깝게 떠 있어 나무랄 것 없는 가을이었다.
회령봉은 평창군 봉평에서 홍천군 내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등산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입 소문이 난 곳이다. 1,300m가 넘는 만만치 않는 봉우리지만 보래령터널 위 약 800m 지점에서 시작하니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겠다. 하얀 물봉선으로 뒤덮인 계곡 초입을 지나면 정상에 가까운 능선까지 꾸준히 오르막이 이어진다. 발길이 많지 않은 까닭에 아름드리 나무에서부터 키 낮은 관목까지 빽빽한 밀림이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철쭉과 단풍나무가 많아 봄가을의 산행길이 어떨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등산로 좌우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진 고목마다 초록이끼를 덮고 있어 원시의 기운마저 감돈다. 맑은 날이면 동북으로는 오대산 설악산까지, 서남으로는 치악산 월악산까지 볼 수 있다. 이름대로 큰 산의 신령들이 모여 들 만한 곳이다. 귀하다는 노루궁뎅이버섯을 2개나 보았으니 신령스런 기운을 받은 듯 하산길이 더욱 가벼웠다.
메밀전병 감자송편으로 그리움을 맛보다
봉평의 메밀밭은 눈요기거리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고 있다. ‘효석문화제’를 시작한 1999년 11ha였던 메밀 재배면적이 2012년엔 69ha로 6배 이상 증가했다. 막국수 열풍을 타고 소비도 꾸준히 늘었다. 봉평장터에서 문학관 앞까지 좁은 구역에 메밀음식 전문점만 어림잡아 10여 개다. 메밀과 감자 요리가 주요 메뉴다. 문학관 앞 ‘메밀마당’은 메밀전병과 메밀전 메밀만두 등 메밀 음식 외에도 쫀득쫀득한 감자송편과 감자전이 맛깔 나다. 봉평장 초입의 ‘미가연’은 일반 메밀보다 알갱이가 작은 ‘쓴메밀’ 요리로 유명하다. 음식 빛깔이 일반메밀보다 조금 더 노릿하다. 묵과 노란 새싹을 들기름에 무쳐 낸 메밀싹 묵무침, 메밀싹나물 비빔밥, 메밀싹 육회 등 메밀싹을 이용한 요리가 많다.
평창=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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