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덕일의 천고사설] 민족대이동

입력
2014.09.09 20:00
0 0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외국인들의 눈에 이해하기 힘든 풍경 중의 하나가 추석이나 설 때의 민족대이동이다. 거의 전 국민이 추석과 설 때 교통지옥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우리도 이 민족대이동의 뿌리를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 유래를 찾아보면 뜻밖에도 옛날의 형벌 중의 하나인 ‘유배’에 가 닿아 있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유배를 우리말로 ‘귀양살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다섯 가지 형벌체계 중에서 두 번째로 강한 형벌이다. 조선은 명나라의 법전(法典)인 대명률(大明律)을 조선 실정에 맞게 변형해 사용했다. 그것이 바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로서 한자(漢字)와 이두(吏讀)를 섞어 기술한 것도 조선 실정에 맞게 변용하기 위한 뜻이었다. 조선의 형벌은 ‘태·장·도·유·사(笞杖徒流死)’라는 다섯 종류로 구성되었다. 태는 10대부터 50대까지 볼기를 치는 태형(笞刑)이고, 장은 60대부터 100대까지 볼기를 치는 장형(杖刑)인데 매의 종류가 조금 달랐다. 도형(徒刑)은 70대부터 100대까지 장형과 3년까지의 징역이 더해지는 복합 형벌이다. 유형(流刑)이 곧 유배로서 보통 장 1백대에 변방 유배가 추가되는 형벌이었다. 사(死)는 사형이다.

그런데 유형(流刑)에는 여러 유형(類型)이 있었다. 그 중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집 주위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유배객을 가두는 것이다. 이 보다 조금 나은 것이 절도(絶島) 안치로서 뭍에서 먼 섬에 가두는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특정 지역에 가서 거주하게 하는 것으로서 보통 유배라고 말하면 이를 뜻한다. ‘귀양이 홑벽에 가렸다’는 말이 있다. 높은 자리에서 권세를 누리고 있지만 귀양은 홑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뜻이다. 높은 자리일수록 화(禍)가 근처에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유배객은 숙식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집안에 돈이 많을 경우 노비가 따라와서 수발을 들지만 그렇게 못한 경우 해당 지역에서 해결해야 했다. 관찰사나 지방 수령은 고을 사람 중 한 명을 보수주인(保授主人)으로 삼아 숙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 유배객이 다시 조정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거나 사론(士論)의 지지를 받는 양심수(良心囚)일 경우는 보수주인도 대우를 잘 해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평생 얹혀사는 신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유배객이 달가울 리가 없다. 자칫 집에서 송장을 치우는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 조광조(趙光祖)는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 때 능성(綾城:전라도 화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를 동정한 능주현감은 조광조를 동정하는 인물을 보수주인으로 정하고 관아에서 심부름 하는 관동(官?)까지 보내서 시중들게 했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잠시 시간이 흐르면 중종이 다시 등용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16일 훈구세력에 휘둘린 중종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유엄(柳?)을 보내 조광조에게 사약을 전달하게 했다.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기 직전 관동을 위로하고 또 주인을 불러서 “내가 네 집에 묵었으니 끝내는 보답하려 했으나 보답은커녕 거꾸로 흉변(凶變)을 보게 하고 네 집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죽어도 오히려 한이 남는다(『중종실록』 14년 12월 16일)”고 위로하고 사약을 마셨다. 중종실록은 단지 ‘주인(主人)’이라고 적었지만 아마도 보수주인일 것이다. 중종실록의 사관(史官)은 “관동과 주인은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고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지금도 조광조에 대해서 말을 하게 되면 문득 눈물을 흘린다.”고 전해주고 있다. 조금 더 편한 유배가 종편부처(從便付處)인데, 외방종편(外方從便)이라고도 불린다. 서울을 떠나 원하는 곳에 가서 거주하라는 형벌이다. 이 경우 대부분 집이 있는 고향을 선택했다. 비자발적인 유배가 종편부처로서 귀향(歸鄕)과 동의어였다. 그런데 이 귀향이 ‘귀양’으로 변하면서 민족대이동의 뿌리가 된 것이다.

귀양은 한자로 ‘歸養’이라고 적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부모를 봉양한다는 뜻이다.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죽은 여섯 충신들, 즉 사육신(死六臣)의 문집이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다. 그 중 성삼문의 문집인 ‘성근보선생집(成謹甫先生集)’에는 ‘최 주부(崔注簿)의 귀양(歸養)을 전송하는 시집의 서문(送崔注簿賜歸養詩序)’이 있다. 성삼문의 친구인 최후(崔侯)가 양지(陽智ㆍ지금의 용인 지역)의 별서(別墅)로 내려간 부친 봉양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따라가겠다고 하자 친지들이 전송하는 시를 써 주었는데, 이 시집에 성삼문이 서문을 쓴 것이다. 성삼문이 “왜 집에서 모시지 않는가?”라고 묻자 “우리 아버지는 그곳에 계셔야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라고 답했다. 부모가 계시는 곳을 따라 내려가 부모를 봉양하는 자발적 귀향이 귀양(歸養)이다. 현재의 민족대이동은 선비들의 이런 효심(孝心)이 산업사회와 접맥된 새로운 풍경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