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기 더 없이 좋은 계절이다. 열대야가 사라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책 읽기에 좋다는 말이 아니다. 도서정가제 이야기다. 오는 11월 20일부터 새로운 정가제가 시행된다. 이제 모든 책은 정가 대비15% 이내에서만 할인을 할 수 있다. 지금은 출간된 지 1년 6개월 이내의 신간인 경우는 총 20%(10% 할인+10% 적립) 할인이 가능하고, 1년 6개월이 지나면 아무 제한이 없다. 정가제란 할인을 15% 이내로 제한하는 법이다.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지리한 과정과 취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소비자 입장에서는 도서정가제가 못마땅한 제도일 수도 있다. 도서정가제의 복잡한 배경과 더 복잡하고 전근대적이라고 해도 좋은 출판 유통 과정 등 얽힌 이야기가 많지만,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가장 큰 까닭은 책이 지독히도 안 팔리기 때문이다. 모든 상품이 그렇듯 잘 팔리지 않을 때 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격을 낮추는 것이다. 이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장의 가격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교과서에나 나올 따름이다. 지금 도서 가격 책정에는 여러 맹점이 있다. 일례로 실용서로 불리는 책은 신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할인을 할 수 있다. 실용서를 왜 따로 구분해서 예외로 삼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지만, 더 놀라운 일은 실용서의 기준이다. 한국에서 실용서란 책 바코드 옆에 적혀 있는 ISBN(국제 표준 도서 번호)에 따라 결정된다. ISBN은 국가, 출판사, 항목 등으로 구성된 책의 고유 식별 번호다. 이 번호 중에 어느 분야의 책인지를 나타내는 다섯 자리 부가기호가 있다. 첫 번째 숫자가 1이면 실용서란 뜻이다. 그런데 이 부가기호는 출판사가 붙이기 나름이다. 책의 내용에 적합한 분야를 표기해야 하는 건 출판사의 재량이다. 여기서 편법이 나온다. 내용과 상관 없이 모든 책에 1만 부여하면 그 책은 실용서가 되고, 무제한 할인이 가능하다. 인문학 책도 ‘입학과 취직에 도움이 된다면 실용적이지 않느냐’는 기이한 논리와 함께 실용서로 변신한다.
한편 진짜(?) 실용서는 낼 때부터 반값 할인을 염두에 두고 제작 부수와 가격을 산정한다. 출간과 동시에 반값 할인 → 베스트셀러 순위 진입 → 대량 판매 기대로 이어지는 마케팅 방법인 것이다. 물론 과도한 할인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내용이 충실하지만 도무지 팔리지 않는 책들도 많다. 지금까지는 이 책들이 폐지가 되지 않고 독자의 손으로 들어갈 마지막 판매 방법은 1년 6개월이 지난 후 할인하는 것이었다. 인문학 독자가 1000명 정도로 줄어들어 든 요즘, 두껍고 어려운 학술, 교양서는 이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었다. 이제 이런 식의 판매가 불가능해진다.
도서정가제는 과당, 편법 경쟁을 막고 오프라인 서점이 회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모든 곳에서 책값이 같다면 시내서점에서 구경하고 인터넷으로 책을 살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번 눈길에서 벗어난 책, 있으면 좋은데 당장 읽을 것 같지 않는 책들을 싸게 살 기회도 함께 사라진다. 11월 20일 시작될 도서정가제를 앞두고 지금 단군 이래 최대의 할인 잔치가 벌어졌다. 한 인터넷 서점에 따르면 50퍼센트 이상 할인하는 책이 8,000여 종에 달한단다. 출판사로서는 재고를 처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그래서 할인 도서 목록에는 종이가 아까운 책들도 있지만 지금 사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양서도 지천이다.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문학 할 것 없이 훌륭한 책들이 떨이로 판매 중이다.
이제 관건은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이다. 시행 직후에는 도서 구입이 급격히 줄어들 게 뻔하다. 반값으로 팔던 물건이 일순간에 모두 제 가격으로 바뀌었을 때 지갑을 여는 데 더 인색해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도서정가제가 많은 이들의 희망대로 비정상적인 마케팅을 바로잡고 출판을 되살리는 불씨가 될지, 앞으로 몇 달 이어질 할인 축제가 종이 책 종말을 앞둔 마지막 불꽃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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