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산책] 증명하는 인간

입력
2014.09.05 20:00
0 0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작년, 오래 사랑해오던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간명한 문장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방심하고 있었다. 글을 쓴 사람은 서효인이라는 시인이었다. 그는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촉망받는 젊은 시인인 동시에 문학전문출판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다. 내 책 몇 권이 출간됐고 앞으로도 출간될 예정인 출판사다. 그곳에서 일하는 서효인 시인의 모습을 몇 번 보았다. 업무를 처리할 때 그는 성실하고 활달했다. 본인이 일부러 말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인이라는 그의 또 다른 ‘업’을 눈치 채지 못할 것도 같았다.

나는, 잘은 모르지만 조금은 아는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글을 읽어내려 갔다. 한국에서 결혼을 하면 보통은 스튜디오에서 웨딩사진을 찍고 뷔페가 딸린 예식장에서 식을 올린다. 시인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 과정을 설명하고 나서 ‘다소 비문학적일지도 모르는 일상의 윤회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고 부연했다. 일상의 윤회라는 부분에서 나는 슬며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즈음의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작가라면 무릇 예술적 영감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리라 추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두 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낮 시간과 모두 잠든 새벽 시간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쓰며 사는 중이었다. 긴 여행이나 해외 체류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며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저녁 외출을 하기 어렵다. 뜨겁게 고취시켜야 하는 예술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뜨겁기는커녕 미적지근하게 데울 시간도 여력도 없이 사는 셈이다. 갓 결혼을 하고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는 젊은 시인이 문득 ‘시를 계속 쓸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부분에 이르러 나는 잠시 독서를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글쎄’라고 읊조리고 있었던 거다. 무심코 지나쳤던 글의 제목을 확인했다. 제목은 이랬다. 증명하는 인간. 그는 무엇을 증명하는 인간이 되고 싶은가.

시인은 한때 죽기 직전까지 시를 쓰는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레 상상했다. 시가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시가 되지 않는 날은 많이 울었다고도 했다. 독자들이 익히 짐작해온 ‘시인다운’ 얼굴이다. 시인은 오로지 문학만을 위해 살며 현실감각이란 전혀 없는 존재이리라는 짐작. 어쩌면 아버지야말로 그 반대편에 위치하는 호칭이다. 아버지는 단단하고 강인한 이름이다. 어떻게든 그런 척해야 하는 이름이다. 이제 시인은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던 날, 분만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난산 끝에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태어나서 울지 않더니 곧바로 인큐베이터로 옮겨졌다. 다운증후군인 것 같다고 의료진이 속삭이는 소리를 시인이자 지금 막 아버지가 된 사내는 듣고 말았다.

은재라는 고운 이름을 가진 그의 딸은 조금 특별하게 태어났다. 21번째 염색체의 숫자가 하나 다르다. 처음에 그는 이 사실을 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아프게 자문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신(神)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시인의 사유는 이어진다. ‘과연 시를 계속 쓸 수 있을까? 그렇게, 인간이란 얼마나 역겨워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희미하고 또렷하게 답하는 이는 누구도 아닌 아이다. 발버둥치며 울다 말고 쌕쌕거리며 잠든 아이, 그 작은 인간을 내려다보며 시인은 비로소 중얼거린다. ‘그럼에도 인간이란 끝내 아름다울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제목의 의미는 말미에 드러난다. ‘무엇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회복하고 싶다. 인간으로서 회복을 문장으로 증명하고 싶다.’ 그 글은 누가 뭐래도 내가 지난 몇 해 사이 읽은 가장 좋은 산문이었다. 얼마 전 그의 글편이 묶여 산문집이 출간됐다. 제목은 잘 왔어, 우리 딸. 책의 디자인은 내 생각보다 더 앙증맞고 깜찍하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느낌의 일러스트가 함께 들어 있다. 내심 ‘증명하는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기대했기에 조금은 아쉬웠지만 표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니 금세 정이 든다. 은재아빠, 직장인, 그리고 시인으로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들이 더 여러 편 담겨 있다. 가끔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책을 만난다. 바로 이 책이 그렇다.

정이현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