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녹화 영상도 단 한 차례뿐 신체적 자유 제약 상태서
부인과 자백 수차례 반복… 진술 증거로 보기에 무리 많아"
북한 보위사령부 직파간첩 혐의자 홍모(41)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피의자 인권침해 방지를 위한 법규를 지키지 않은 것을 강도 높게 질책했다. 장기간 감금에 따라 위축된 상태에서 검찰이 형식적으로 고지한 진술거부권 등은 사실상 고지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한 것이 눈에 띈다.
자백 과정 믿을 수 없어
홍씨가 자신이 간첩임을 인정하는 자백을 한 것은 크게 세 차례.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84일간 진행된 합신센터의 2차 조사, 이후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과정에서다. 재판부는 세 차례에 걸쳐 작성된 홍씨의 진술조서가 모두 형사소송법에 어긋난 위법증거로 판단했다.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했던 자신의 진술 내용을 법정에서 부인할 경우 영상녹화 자료 등이 제시되지 않으면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 수사기관이 고문 등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던 과거 악습을 막기 위해서다. 국정원과 검찰의 피의자 신문은 단 한차례만 빼고는 영상녹화 등이 이뤄지지 않아 재판부가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영상녹화가 이뤄진 2월 20일 검찰의 첫 피의자 신문 역시 재판부는 진술거부권 및 변호인 조력권 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아 증거능력이 없다고 봤다. 검사는 홍씨에게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별도로 선임(하라)”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냐” 등의 말을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진술을 하지 않아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진술한 내용은 유죄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등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불분명ㆍ불충분한 고지라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탈북자로서 대한민국의 형사 실체법과 절차법을 잘 알지 못하는데다가 상당기간 사실상 신체의 자유가 제약된 상태에 있었으며, 장기간 계속된 합신센터 조사에서 부인과 자백을 수회 반복하였던 사정 등을 감안하면 위와 같은 ‘적법한 절차와 방식’의 준수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위 권리들을 보장받을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고 보인다”고 지적했다.
검찰 관계자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테러ㆍ안보 사범에 대해서 특별법까지 제정해 기본권을 어느 정도 제약해가면서 입증을 용이하게 해 진상규명에 무게를 둔다”며 “우리나라는 수사상 제약이 많을 뿐 아니라, 법원에서 일반 형사범에 비해 오히려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형식논리로 증거를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국정원 수사 방식 문제점
서울시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 이어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의 위법적인 조사도 또 다시 지적됐다. 합신센터는 탈북자들에 대한 행정 조사 권한만이 있을 뿐 수사권한은 없다. 그러나 사실상 수사로 전환된 다음에도 ‘행정 조사’라는 탈을 쓰고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 등을 고지하지 않는 문제점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국정원이 홍씨에 대한 간첩혐의를 처음 제보 받은 것은 지난해 8월 19일로 홍씨가 탈북해 입국한 지 3일쯤 지나서였다. 재판부는 “(기무사 조사관이 1차 조사를 마친 후) 2차 조사 개시 시점인 2013년 10월 15일부터는 합신센터 조사관들이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다고 보고 수사행위를 한 것”이라며 “홍씨는 실질적으로 피의자의 지위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홍씨는 2차 조사가 진행되고 나서야 자신이 간첩임을 자백하는 진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재판부는 “진술거부권, 변호인 조력권이 고지되지 않은 채 취득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임시보호처분의 명목으로 영장 없이 이루어진 위법수집증거”라고 지적했다. 또 “보호여부 결정 등을 위해 필요한 조사라는 명목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사실에 관한 자백이 담긴 진술서를 받아두는 방식으로 우회적, 탈법적인 수사를 시도할 위험이 크다”며 “인권의 침해를 예방하고 그 보장을 위해 마련한 형사절차상 권리나 규정들이 형해화(무력화) 할 위험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합신센터 조사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변호인은 “홍씨는 합신센터에서 언제 석방될 수 있는지 등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합신센터에서) 총 135일간 수용됐다”며 “이는 그 자체로 고문”이라고 주장했다.
간접 증거들도 인정되지 않았다. 제보자인 탈북 브로커 유모씨는 “도강(渡江) 일정을 여러 차례 무산시키고 도강 장소를 바꿨다” “사돈여자로부터 ‘홍씨가 북한 보위부와 관련 돼 있다’는 말을 들었다” 등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정황 등을 종합해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일부 언론에서도 이러한 공소사실을 뒤엎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보도되기도 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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