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를 하러 고향인 제천에 다녀오는 길에 두 군데 친척 집엘 들릅니다. 먼저 첫 번째 집입니다. 벌초를 하고 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던 가운데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 집 식구들의 안부가 궁금해 사진첩을 봐도 되냐고 묻습니다. 갑자기 웬 사진첩 타령이냐며 아주머니가 옷장 깊숙이에서 사진첩을 꺼내옵니다. 어렸을 때 같이 뛰어 놀던 친척 형제들은 이렇게 장성해서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 내 마음은 좋은데 아저씨 아주머니는 눈물바람이 납니다.
아주 오래 전 그 집에 태어난 첫 번째 손자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명절날 차례를 마치고 음식 하나를 집어 먹다 변을 당해 세상을 뜬 일이 있는데 눈치도 없이 사진첩을 보겠다는 바람에 그 아픈 일이 다시 밀려온 것입니다. 그 일 이후 손자를 잃은 슬픔에 아저씨는 담배가 늘었고 먼 곳을 보는 일이 많았고 그것이 쌓일 대로 쌓인 것인지 최근에는 폐암 말기 선고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왜 사진첩을 보겠다고 해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느냐고 핀잔하지만 두 분 부부는 행여 손자 생각이 날까 봐 꺼낸 적이 없었다며 연신 흘끔흘끔 가족사진 속의 손자를 내려다봅니다. 꽤 성장했던 손자의 그때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두 분은 연신 눈가를 훔칩니다.
집에 아픈 가지 하나쯤 없는 집 있을까마는 이 집의 아픈 가지는 그 일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친척집이라 여러 번 이 집엘 방문했지만 알게 모르게 드리워진 그늘의 정체는 바로 그 슬픈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집으로 갑니다. 마루에 들어서자마자 상당히 크게 뽑아 놓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사진 때문에 집이 좁아 보일 정도입니다. 여러 명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지금은 없는 사람이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이혼을 해서고, 다른 한 사람은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입니다. 이유야 있었겠지만 그 일을 겪는 가족들은 한 생을 살면서 겪지 않아야 할 일을 겪음으로 해서 당장의 삶이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삶의 방식을 달리 선택한 당사자들도 견딜 수 없는 생의 불편함의 무게를 어쩌지는 못했겠지만 말입니다.
하필이면 부모님과 제가 앉은 자리가 가족사진이 걸린 벽을 마주 보고 앉는 자리여서 마땅히 눈 둘 데는 없고 자리 분위기도 영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때 바깥분이 한마디 하십니다. “내가 저 사진을 떼어버리자고 몇 번을 말했는데 집사람이 말을 안 들어요.” 그러자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아니, 저걸 왜 떼요? 자꾸 봐야지요. 자꾸 봐야지, 우리가 한때 저랬었다는 걸 알게 되잖아요. 난 절대로 안 떼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 위로 슬며시 고통의 근육 몇 가닥이 움직이지만, 그러면서도 슬쩍 안쪽 이를 깨무는 것도 같지만 그렇게 말하는 용기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굉장한 질량의 긍정입니다. 참 오랜만이다 싶은 엄청난 밝음, 그 빛 앞에서는 도저히 그 무엇도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루 동안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의 두 집에서 본의 아니게 아픈 사진들을 보게 됐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박물관에 들른 탓인지 마음은 꽁꽁 잡아매놓은 것처럼 불안하게 탱탱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동안 살면서 만났고 정을 나눴고 그러다 지워 없앤 뭇사람들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나는 박물관 안에서 온 마음을 다해 ‘괜찮으시죠?’ 라고 안부를 묻고 싶으나 그러질 못하고 그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마음속으로만 ‘괜찮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얼마를 더 살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얼마를 더 살게 될 것인지를 우리가 셈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고 우리가 관여할 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치면 우리 살아온 날들에, 좋은 날은 얼마나 많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감히 그 힘으로 살아도 될 그런 날들이, 그 힘으로 더 좋은 것들을 자꾸 부르는 그런 날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분량 만큼의 슬픔만 나눠준다고 하지만 그 슬픔을 딛고 뛰어 넘을 수 없을 때 인간의 삶은 그저 거꾸로 흐른다는 사실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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