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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버려진 땅을 치유정원으로...情 쌓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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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버려진 땅을 치유정원으로...情 쌓여요"

입력
2014.09.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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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고 삭막했던 공간을 환경운동가·주민 함께 가꾸자 100여평 멋진 정원으로 변신

남녀노소 하나 둘 모여들며 음식 나눠 먹고 고민도 해소

단지 내 사랑방 역할 톡톡

"이웃과의 소통은 큰 행복" 소외된 사람들 돕기 나서

아파트 주민들이 나서 단지의 외진 공간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정원을 조성하며 하나가 되었고, 그곳에서 서로의 애환을 나누며 정을 쌓았다. 경기 용인시 보정동 포스홈타운 1단지 아파트 주민들이 자신들이 조성한 '치유정원'을 가꾸고 있다.
아파트 주민들이 나서 단지의 외진 공간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정원을 조성하며 하나가 되었고, 그곳에서 서로의 애환을 나누며 정을 쌓았다. 경기 용인시 보정동 포스홈타운 1단지 아파트 주민들이 자신들이 조성한 '치유정원'을 가꾸고 있다.

“누가 음료수랑 과자를 놓고 갔네요. 이것 드셔보세요.” “모란시장에 갈까 했는데 추석 대목장이라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 못 갔어.” “나 집 팔았어. 그런데 이 동네 떠나기 싫어서 옆 동으로 옮기기로 했어. 여기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잖아.”

시골의 사랑방에서나 들음직한 대화가 오가는 이 곳은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포스홈타운 1단지 내 정자. ‘삭막하다’는 표현이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아파트 단지 주민들간 대화라고 하기에는 다소 생경하지만 이 아파트에서만은 예외다.

남편과 자식의 출근ㆍ등교 시간이 지나자 전원주택의 잘 가꿔진 개인 정원 같은 정자 주변으로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 나온 어린 손녀부터 90대 할머니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쌀 과자를 놓고 가는 할아버지, 차를 준비해오는 아주머니, 떡을 가져와 나눠먹는 할머니까지 비록 거창한 요리는 아니지만 이곳에는 먹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시골 사랑방 모습 그대로다. 이들은 정자에 빙 둘러 앉아 누군가가 말없이 놓고 간 음료수와 주전부리를 나눠 먹으며 남편과 자식 이야기, 외출해서 겪은 일, 마음속에 담고 있던 고민 등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으면 모두가 같은 일을 겪은 동료의 마음으로 함께 고민하고 조언을 해준다.

정자를 중심으로 한 정원은 이들에게는 힐링의 공간이자 도심 속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부인을 떠나 보낸 후 외로움에 우울증을 겪었던 실향민 할아버지는 말동무를 얻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부모의 이혼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소극적이기만 했던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는 이사를 가면서 이웃들에게 “많이 사랑해줘 고맙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떠날 정도로 변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100여평 남짓한 이 공간을 ‘치유정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치유정원’이 생기기 전 이 곳은 비행 청소년들의 일탈의 장소였다. 아파트 단지 내 가장 외진 곳에 정자만 덩그러니 있고 인근에 쓰레기 분리수거장까지 있으니 주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은 당연했다. 주민들의 발길이 뜸하면서 어느 순간 이곳은 청소년들의 흡연과 음주를 위한 장소가 됐다.

그러던 이곳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30여년 간 환경운동가로 활동했던 강신정(65ㆍ여)씨가 2011년 버려진 공간을 정원으로 바꾸기로 마음 먹으면서부터다. 강씨는 뜻이 맞는 주민 3, 4명과 함께 버려진 이곳에 생명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집에서 시들어가는 화분의 꽃과 나무를 옮겨 심었고 사용하지 않고 창고에 뒀던 테이블과 의자 등을 가져다 놓았다. 아파트 재활용쓰레기 수거일이면 버려진 물품들 사이에서 쓸만한 물건을 모아 정원을 꾸몄다. 금이 간 항아리도 깨진 유리병도, 낡은 나무 인형도 정원을 꾸미는 좋은 소품이 됐다. ‘치유정원’ 가꾸기에는 절대 돈을 들이지 않고 철저히 재활용품과 주민들이 사용하지 않는 물품만을 이용했다.

방치된 공간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자 주민들의 동참이 서서히 늘어났다. 자신이 쓰던 돌 빨래판을 가져다가 산책로 징검다리를 만들고 아버지 산소에 조각공원을 만들기 위해 모아뒀던 조각품까지 아낌없이 정원 가꾸기에 내놓는 사람도 생겨났다. 한 주부는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가 선물로 준 ‘천사의 나팔꽃’을 기증하고 정원에서 항상 어머니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느덧 ‘치유정원’을 아끼는 사람들끼리 동호회까지 만들었다. 회원은 20명을 넘어섰다. 최영심(66ㆍ여)씨는 “방치됐던 공간이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부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죠. 처음엔 시들던 나무가 치유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가 치유가 되고 있어요”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치유정원을 가꾸면서 이웃과의 소통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게 된 회원들은 정원 가꾸기에 머물지 않고 소외된 이웃을 살피는 데까지 눈을 돌리고 있다. 올해 4월에는 주민들이 도서 모으기 운동을 해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인 부산 장대현학교에 1,050권의 책을 전달했다. 또 아파트 내 창고에 일명 ‘그린창고’를 만들어 주민들이 기증한 잉여물품을 모으고 있다. 5톤 트럭 1대 분량의 물품이 그린창고를 채우면 소외된 이웃들에게 기부할 예정인데 올해 두 번째 기부를 앞두고 있다.

강씨는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웃들과의 단절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파트 빈 공간을 정원으로 가꾸면서 이웃들과 마음을 열고 지내는 여가문화가 고스톱이나 치면서 시간을 때우는 노인정 문화를 바꾸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ㆍ사진=김기중기자 k2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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